조세정의와 복지국가

필자가 주 핀란드대사로 헬싱키에 부임한 직후 핀란드어를 배우기 위해 헬싱키대학교 한국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인 핀란드 여대생을 초빙하여 1년여 동안 대사관에서 직원들과 더불어 현지어를 배운 적이 있다. 핀란드 사람들은 공무원들은 물론이고 일반 국민들 까지도 영어를 잘 하기 때문에 굳이 업무를 위해 핀란드어를 배울 필요는 없었지만 현지어 학습을 통하여 현지인들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간단한 인사말이라도 구사하는 것이 현지인들에게 호감을 사는 지름길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현지어 학습을 하면서 언어를 통해서 보다도 강의를 맡은 여학생의 태도를 통하여 핀란드 인에 대해 더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핀란드어 학습을 시작한지 한 달 쯤 후에 여학생에게 30만원 상당의 교습비를 지급하자 이 여학생은 소득신고를 해야 한다며 세금계산서를 끊어 달라고 요청하는 게 아닌가. 우리나라에서 대학생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더 많은 소득을 올려도 세금을 낼 생각을 하는 사람이 없을 텐데 이 어린 핀란드 여학생은 소득이 있으면 반드시 세금을 내야한다는 납세의식이 투철하였던 것이다. 여학생의 납세정신은 필자는 물론 함께 수강한 대사관 직원들에게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후 핀란드에서 3년간 근무하면서 핀란드 국민들의 투철한 납세 정신이 이 여학생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체험할 수 있었다. 작은 가게나 심지어 노점상에서 얼마 안 되는 물건을 사더라도 휴대용 세금계산기를 이용하여 영수증을 발급하는 것이 정착되어 있었다.
핀란드 자영업자의 소득신고는 놀라울 정도여서 탈세율이 핀란드 정부 추산으로 3-5%에 불과하다. 평균 담세율이 45%이고 고소득자의 경우 소득의 60%까지 세금으로 내는데 자영업자의 95%이상이 성실하게 소득신고를 한다는 뜻이다. 핀란드가 일인당 국민소득 4만 5천불에 세계 최고 수준의 복지국가를 유지하는 비결이 바로 이러한 철저한 납세의식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납세의식과 더불어 핀란드의 독특한 제도는 소득 수준에 비례한 누진제 벌금제도이다. 우리나라에도 부자 몸조심이라는 말이 있지만 핀란드에서는 부자가 몸조심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는데 다름 아닌 교통 범칙금 누진제도이다. 핀란드 역사상 가장 많은 속도위반 벌금을 낸 사람은 제한 속도 40키로 도로에서 제한 속도의 2배인 80키로로 달리다가 경찰에 적발된 핀란드 모 재벌 그룹 상속자인데 무려 17만 유로(당시 환율로 2억 2천 만 원)의 벌과금을 발부 받았다. 핀란드 경찰은 교통 법규 위반자를 적발하면 휴대전화 단말기를 통해 국세청에 위반자의 소득 수준을 조회하여 교통법규 위반 정도와 연계하여 벌금을 부과하는데 이러한 벌금 누진제는 소득 수준에 관계없이 교통법규를 준수하게 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국토는 넓고 인구는 적어 텅 빈 핀란드의 고속도로에서 과속하는 차를 거의 발견하기 어려운 것은 이러한 연유에 기인하는 것이다.

귀국 후에 가장 비교되는 것 중의 하나가 우리나라 자영업자들의 공공연한 탈세 행태이다.
현금영수증제도의 도입과 카드 사용분에 대한 소득세 공제혜택 등을 통하여 자영업자들의 소득원이 많이 투명해지고 있지만 아직도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나 서비스 업소에서 현금을 내면 값을 깎아 주겠다는 제의를 받는 것은 보통이고 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는 성형외과나 치과에서는 아예 카드를 받지 않는 경우가 비일 비재하다. 한국 조세연구원에 의하면 2003-2006년간 자영업자의 소득 신고 율은 63%에 불과하고 탈루세액이 32조원을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자영업자들의 탈세는 소득원이 투명한 봉급생활자들과 비교하여 과세의 불평등을 야기할 뿐 아니라 소득이 높은 부유층이 오히려 국민연금과 건강보험료를 회피토록 함으로써 정부의 재정 부담을 가중시키게 된다. 우리나라가 선진 복지국가로 발전해 나가기 위해서는 조세정의의 확립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자영업자들의 탈세율을 낮추는 것이 선결 요건이다. 구미 선진국에서 탈세자는 일반 절도죄보다 엄벌에 처해지고 기업의 탈세 시에는 기업의 회생이 어려울 정도로 처벌을 받는데 우리나라는 조세 범죄에 대해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는 경우가 많은 것도 탈세를 부추기는 요인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성실한 납세가 선진 민주시민의 기본 덕목임을 어린 시절부터 교육시키고 불성실한 납세자에 대해서는 국가 재산 절도죄에 해당하는 엄벌에 처함으로써 조세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 민주 복지사회로 나가는 길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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