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유자 : 여보소, 농부님네들!
뒷소리꾼들 : 예!
보유자 : 오뉴월이 당도허여 우리농군 시절로 와버렸네 그려. 모를 심으면서 상사소리를 해보세!
뒷소리꾼들 : 그러세

메기는소리(보유자) : 여 여허~ 여~ 여허루~ 상사뒤이~여
받는소리(뒷소리꾼들) : 여 여허~ 여~ 여허루~ 상사뒤이~여
메기는소리 : 모손을 갈라쥐고 거듬거듬 심어나보세
받는소리 : 여 여허~ 여~ 여허루~ 상사뒤이~여
메기는소리 : 여 여허~ 여~ 여허루~ 상사뒤이~여
받는소리 : 여 여허~ 여~ 여허루~ 상사뒤이~여
메기는소리 : 여기도~ 꽂~고오~고 주인마님 그 자리도 꽂아나보세
받는소리 : 여 여허~ 여~ 여허루~ 상사뒤이~여
메기는소리 : 이 농사를 잘 지어서 선영 봉제사 하여나보세
받는소리 : 여 여허~ 여~ 여허루~ 상사뒤이~여
메기는소리 : 앞산은~ 멀어지고 뒷산은 가까워지네
받는소리 : 여 여허~ 여~ 여허루~ 상사뒤이~여
<금과들소리 ‘모심기소리(상사소리)’ 중에서>

‘노동요(勞動謠)’는 일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를 통칭하는 말이다. 우리 조상들은 고되고 힘든 노동(일)을 하면서 노래와 추임으로 힘을 덜 들이고 능률을 높였다. 농업은 말할 것도 없고, 어업이나 운반 노동, 길쌈 등을 하면서도 노래를 불렀다. 각종 뱃노래나 부녀자들의 길쌈노래, 방아타령, 밭매는 소리, 모내기 소리, 들소리 등이 대표적인 노동요로 꼽힌다.
일터에서 부르는 노동요는 대개 반복되는 작업의 지루함을 덜기 위해서, 또 일정한 리듬을 계속 유지해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 부른다. 이러한 노래에는 노동자들이 일하면서 내는 소리, 몸 움직임, 연장소리가 섞여 있는 것이 보통이다.
노동요 중에서도 힘든 농삿일을 극복하고 한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기 위한 ‘농요(農謠)’는 ‘들소리’라고도 하는데, 전국적으로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많이 발달했다.
‘모내기소리’ ‘김매기소리’ ‘곰배질소리’ ‘밭모종소리’ ‘농부소리’ ‘죽먹이소리’ ‘연밥따는소리’ ‘모찌는소리’ ‘논밭갈기소리’ ‘밭밟기소리’ ‘밭매기소리’ ‘벼베기소리’ ‘미나리캐는소리’ 등 다양한 들소리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순창의 농요 ‘금과들소리’
순창군은 예로부터 물이 맑고 순박하며, 절경이 많고 인심이 후덕해 인물이 많이 배출된 고장이다. 서북쪽은 산지로, 남동부는 섬진강과 적성강 등을 끼고 분지를 형성하고 있다.
순창은 소리꾼을 많이 배출한 곳으로도 유명한데, 동편제의 거두였던 김세종, 장자백, 장판개 등과 서편제로 일가를 이뤘던 박유전이 모두 순창 출신이다. 순창지역에 전해지는 금과들소리에서 판소리 동편제와 서편제의 특성이 골고루 나타난다는 사실은 판소리 동편제의 고장이면서 서편제의 탯줄이 되었던 곳임을 짐작케 해 준다.
약 500여년 전부터 행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순창 금과들소리는 힘든 농삿일을 극복하면서 동시에 풍년을 기원하는 농민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소박하고 흥겨운 농요와 풍장굿의 신명은 금과들소리가 왜 도내 유일의 농요 부문 무형문화재로 지정됐는지 설명해준다.
금과들소리는 금과면 소재지인 매우리를 중심으로 동전리, 대장리 들녘에서 불리던 농요다. 힘든 농사일을 상부상조의 품앗이를 통해 극복하면서 동시에 풍년을 기원하는 농민들의 마음이 소박하고 흥겨운 농요와 풍장굿의 신명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농요와 두레 풍장굿은 모심기 끝의 세레시침, 만두레 끝의 장원질 놀이, 칠월백중의 머슴살이, 들독들기, 전답제 등으로 이어지는 마을축제의 기틀을 형성했다.
농경문화의 쇠퇴와 변화에도 불구하고 금과들소리는 이 일대 노인들을 중심으로 계속 전해져 내려오다 1997년 순창군민속예술제에 출전하면서 대중에 공개됐다. 이후 가치를 인정받아 지속적인 보존활동이 이뤄졌으며, 전국농악경연대회와 전북민속경연대회, 한국민속예술제, 전국향토민요경창대회 등에서 각종 상을 수상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2002년 10월 제43회 한국민속예술제에서는 종합 최우수상인 대통령상을 거머쥐면서 무형문화재 지정의 기반을 마련했다.
2003년부터는 매년 6월 금과들소리 현장공연을 갖고 있으며, 2005년에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되었다.

판소리의 우조와 계면조의 영향 받아
금과들소리는 판소리에서 사용되는 2개의 주요한 악조인 우조와 계면조의 음계 오선법이 고루 섞여 두 악조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 또한 도내 서부 평야지역의 들노래가 대개 선후창 방식인데 비해, 금과들소리는 선후창 방식과 교환창 방식, 제창 방식이 고르게 섞여있다. 김매기의 단계에 따른 곡조의 분화가 매우 다채로운 것도 특징이며, ‘하’ ‘허’ ‘흐’ ‘해’ ‘후’ ‘히’ 등과 같은 기식음(氣息音)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씩씩한 느낌을 중시한다.
금과들소리의 시작인 모심기소리(상사소리)는 선창자가 앞소리를 매기고, 나머지 일꾼들이 뒷소리를 받는 선후창 방식으로 행해진다. 앞소리에서 모를 심고 후렴구를 부를 때는 허리를 펴고 일어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신명을 낸다.
이어 김매기소리가 행해지는데 금과들소리의 김매기소리는 다른 들소리에 비해 매우 다채롭다.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잡초를 뽑고 흙을 뒤집어 벼의 활착을 돕는 김매기 작업이 보통 3~4차례 이뤄졌는데, 이같은 김매기 작업은 가장 더운 시기에 가장 많은 품이 드는, 그리고 가장 힘든 일이었다. 모를 심고 나면 약 20일 뒤에 첫 번째 김매기인 ‘호무질’을 시작으로, 약 10일 간격으로 ‘한벌’, ‘군벌’, ‘만드레’ 등의 순으로 김매기가 행해졌다.
첫 번째 김매기 ‘호무질’의 소리는 ‘첫 문을 열다’는 의미의 ‘문열가’다. 금과들소리의 문열가는 다른 곳과 달리 후렴구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두패로 나뉘어 교대로 부르는 교환창 방식으로 불리는데 문답이나 댓구 형식이 아닌 독립된 사설로 이뤄졌다. 일꾼들 중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이 사설 머리를 내면, 나머지 사람들이 따라부르는 선입후제창 방식으로 부른다.
이어 ‘한벌’ 김매기소리는 ‘연꽃타령’, ‘군벌’은 ‘방아타령’, ‘만드레’는 ‘사호소리’라고 지칭됐다.
한 벌 매기부터는 맨손으로 김을 매는데, 호미질로 울퉁불퉁해진 흙을 손으로 고르며 김을 맨다. ‘연꽃타령’ 역시 두 패로 나누어 부르는 교환창 방식이며, 앞 패가 후렴구까지 부르고 후에 뒷패가 다른 사설로 소리를 받는 방식으로 행해진다.
‘방아타령’은 ‘문열가’와 같이 박자에 구애받지 않고 느리고 유장하게 부른다. 선후창 방식으로 부르는데, 느린 중머리 2장단 길이의 메기는소리에 비해 받는소리가 세배 정도 긴 것이 특징이다.
‘사호소리’는 김매기 막바지에 일꾼들이 둥글게 원으로 좁혀서 일을 마치기 때문에 이 모양이 마치 상추쌈을 하는 모양과 같다 해서 ‘싸호소리’, 또는 ‘사허소리’ 등으로 불렸다.
김매기소리에 이어서는 장원질소리가 행해지는데, 이는 농삿일이 끝난 후 마을에서 가장 농사를 잘 지은 일꾼을 장원으로 뽑는데서 유래했다. 장원으로 뽑힌 일꾼을 다른 일꾼들이 에워싸고 당사실로 치장한 소의 잔등에 태워 삿갓을 거꾸로 씌우고 풍장을 치며 마을을 함께 도는데 이때 부르는 소리가 ‘에야타령’이다. ‘에야타령’과 비슷한 농요가 옥구, 진안, 김제 등에서도 불렸는데, 모두 세마치 장단에 선후창 방식으로 행해졌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이같은 농요가 ‘진도아리랑’의 원형이 됐다는 주장도 내놓고 있다.
/소문관기자․mk7962@

■ 인터뷰 - 금과들소리 예능보유자 이정호씨
“금과들소리는 다른 소리에 비해 힘이 있고 흥이 납니다.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다른 지역의 들소리를 들어봐도 우리 순창 들소리만큼 신명나고 구성지지는 못한 것 같아요.”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32호 순창농요 금과들소리의 유일한 예능보유자인 이정호(71) 옹은 금과들소리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했다.
순창군 금과면 매우리에서 태어나 70평생을 이곳에서 살아온 그는, 같은 시대의 또래들이 모두들 그랬듯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그대로 겪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그는 다섯 살때 해방을 맞았고, 초등학교 다닐 때 6.25동란을 겪었다. 보릿고개에는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 갖은 고생을 겪었다.
그 역시 다른 아이들처럼 어려서부터 들에 나가 농삿일을 도운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농삿일은 모내기, 김내기, 수확 등 모든 작업이 수작업으로 이뤄졌는데 그때마다 시기에 맞는 농요가 불리워졌다. 어른들을 따라 농삿일을 거들면서도 구성진 농요가락이 귀에 쏙쏙 들어왔고, 그는 완벽하게 그 소리를 기억했다.
하지만 농삿일이 점점 기계화되면서 들소리를 부르는 횟수도 점점 적어졌고, 들소리가 완전히 잊혀졌다 싶었을 때쯤 순창군민의날 행사에서 그는 다시 들소리를 재현해냈다.
원광대 박순호 교수를 만나 것도 그 무렵이었다. 박 교수는 이옹을 만나 곡을 채록하고 악보를 만들어 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할 수 있도록 했다.
버스를 다섯 번씩 갈아타면서도 오지 방문을 마다하지 않았던 박 교수의 열정과 이옹 등 매우리 주민들의 열성으로 금과들소리전수회도 창립됐고, 결국 무형문화재로까지 지정됐다.
“들소리 가운데 고성이나 통영, 밀양 등은 모두 국가중요무형문화재로 등록돼 있습니다. 하지만 전북에서는 금과들소리만 전라북도지정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있을 뿐 국가지정 문화재는 아직 없습니다. 순창 금과들소리가 국가지정 문화재로 승격될 수 있도록 남은 여생을 바치겠습니다.”
/소문관기자‧mk7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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