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무력을 앞세워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갔다. 이후 차례로 군대를 해산시키고 사법권과 경찰권까지 박탈시킨 뒤 1910년 한일합병(韓日合倂)을 자행한다. 일제가 단발과 창씨개명으로 민족정신을 말살하려 혈안일 때, 칼을 들고 머리를 깎으려는 순사들에게 오히려 호통을 치던 이가 있다. 그는 유재 송기면(裕齋 宋基冕)으로 광복을 맞이하는 순간까지도 단발과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일제에 저항했다.유재는 근대 유학자이자 서화가로 1882년(고종 19) 김제시 백산면에 있는 요교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여산(
천년고도 전주에서 오랜 시간 명맥을 이어온 완산칠봉. 도심 속에 자리한 완산칠봉은 동학농민운동 때 격전이 벌어졌던 장소이기도 하다. 현재는 푸르른 녹음이 우거진 완산공원이 조성돼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정상으로 올라가려면 꼬불길을 걸어가야 하는데 길이 꺾기는 지점마다 비석이 세워져 있다.그중 하나가 ‘해학 이기선생 구국운동 추모비’이다. 이는 1983년 해학 이기 선생 구국운동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에서 건립한 것이다.해학 이기(海鶴 李沂)는 실학자이자 근대적 개혁사상을 바탕으로 항일투쟁과 제도개혁에 힘쓴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요교마을의 한 초가집. 작업자들이 분주하게 지붕을 오르내린다. 초가에선 한 해 묵은 지붕의 볏짚을 모두 걷어내고 새 볏짚으로 엮은 이엉을 잇고 있다. 이석정선생생가에서 매년 치러지는 연례행사다.석정 이정직(石亭 李定稷)은 1841년(헌종 7) 이곳에서 태어났다. 석정은 요교마을에 기거하면서 손님을 맞거나 후학들을 지도했다. 본관은 신평(新平)으로 자는 형오(馨五), 호는 석정(石亭), 석정산인(石亭山人), 연석(燕石) 등이 있다.어릴 적부터 총명해 4세 때 천자문을 읽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12세부터는 강
사내들이 모여 썰물 때만을 기다리고 있다. 육지와 떨어져 있는 작은 섬인 계화도로 가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물이 빠지자 질퍽한 갯벌을 추적추적 걸어간다. 보물이라도 숨겨뒀나 했는데 알고 보니 종착지는 계화재(繼華齋)였다. 이는 간재 전우가 1913년 계화도 양리(陽里)에 지은 것으로 계화재라는 편액을 걸고 강당으로 사용했다. 제자들이 물 밀려오듯 공부하러 오면서 주변에는 강학을 위해 들어선 건물만 13동에 달했다.간재 전우(艮齋 田愚)는 1841년(헌종 7) 전주부 청석리(지금의 전주시 다가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담양전씨(潭陽
“신여암 선생은 고령인이니 경준은 휘요. 순민은 그의 자이다. ……이렇듯 거룩하신 어른을 말하면서 그의 호만으로는 부족하야 다시 그 휘와 그 자를 쓰게 되는 것을 보면 마치 이 세상에 대하야 첫 번으로 소개되는 것 같다. 세상이 다 여암 선생을 고로 알지 못할새 이렇게 써서 알어드리기를 구하는 것이 아닌가. 이 어쩌 개연치 아니한가.” 일제강점기 국학운동을 주도한 위당 정인보가 동아일보에 연재한 ‘여암 고택방문기’의 일부다.순창군 순창읍 가남리 남산마을에 자리한 여암 고택. 푸른 잎이 우거진 가운데 여전히
부안군 변산반도의 한 자락. 반계 유형원이 자리 잡은 이곳은 우반동(지금의 우동리)이다. 뒤로는 변산(봉래산)이 넓게 감싸고 있고 앞에는 산줄기에서 흘러온 계곡물이 바다와 만났다. 그가 살던 초가집에는 책이 만권이나 꽂혀있었고 뒤뜰에는 천 그루의 대나무가 우거져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푸른 잔디밭에 집터였음을 알리는 비석과 직접 판 것이라 전해지는 우물만 남아있다. 대대로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큰 선생집터라고 불렀다.변산의 큰 선생인 반계 유형원은 1622년(광해군 14) 한성에서 태어났다. 그가 두 살이 되던 해 인조반정이 일어난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의 굽은 길을 따라가다 보면 한적한 남전마을이 보인다. 그곳에는 고현동각(古縣洞閣)이 자리 잡고 있다. 동각은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집이라는 뜻으로 대문 양쪽에는 삼강(三綱)과 오륜(五倫)이 각각 새겨져 있다. 불우헌 정극인이 주축이 된 태인 고현동 향약을 실시하고 기록하던 곳이기도 하다.정극인은 진사 정곤(丁坤)의 아들이다. 1401년(태종 1) 경기도 광주의 두모포에서 태어났다. 자는 가택(可宅)이며 호는 불우헌(不憂軒), 다헌(茶軒), 다각(茶角)이다. 불우헌은 근심이 없는 집이라는 뜻으로 그가 정읍에 낙향
정읍시 보림리 관동마을을 지나다 보면 고고한 기품이 느껴져 사뭇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곳이 있다. 바로 남고서원이다. 남고서원은 일재 이항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그의 곧은 정신을 기리기 위해 위패를 세운 곳이다. 1685년(숙종 11) 가치를 인정받아 사액을 받게 되었다.이항은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 이자영(李自英)의 아들로 한양에서 태어났다. 자는 항지(恒之)이고 호는 일재(一齋)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무예에 능하고 기세가 남달랐다. 넘치는 기세는 여러 기록에 남아 있는데 그중에 정읍시 태인면 태서리
선진유학을 정립한 공자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는 말을 했다.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내용으로 옛것을 충분히 익혀 새것을 안다는 뜻이다. 여기엔 배웠던 학문을 다시 연구하고 새로이 해석해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경지에 통달한 후에야 비로소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전라북도에서는 공자의 가르침대로 옛 학문인 유학을 들여다보면서 지역의 정체성을 찾고 나아가 전북을 발전시킬 방법을 찾고 있다. 그에 발맞춰 전라일보는 유학을 진흥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전북의 유학자들을 10회에 걸쳐 조명해보고자 한다. 전북유학의 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