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복리미륵암석불(2015년 촬영)
남복리미륵암석불(2015년 촬영)
두승산 미륵암(2015년 촬영)
두승산 미륵암(2015년 촬영)
정읍 남영마을
정읍 남영마을
두승산 미륵암 석불
두승산 미륵암 석불

 

“도마뱀이 개구리를 잡아먹을 때 남북이 통일된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정읍 고부면 남영마을에서 예부터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다.

남영마을은 고부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1km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조선시대 정조 13년인 1789년 ‘호구총수’에 ‘남정’이라는 지역명으로 표기돼 있고 1965년 편찬된 ‘향토편람’에는 ‘남정리’와 ‘영광리’로 기록돼 있다. 이후 1985년 편찬된 ‘정읍군사’에는 남정마을 과 영광마을로 칭해졌으나 이 두 마을이 합쳐지며 오늘의 남영마을이라는 명친으로 불리게 됐다.

남영마을 주변에서 삼국시대 토기조각이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이전부터 주민들이 터를 이뤘음을 알 수 있다.

마을 앞으로는 국도가 이어진다. 원래는 면소재지를 경유했는데 1998년 12월 30일 정읍 고부면 입석리와 장문리 1.62km구간이 개통돼 직선으로 우회도로가 개설됐고 2013년 12월 정읍~신태인간 9,216km구간이 확장 개통됐다. 

마을 입구엔 ‘남영제’와 ‘당산입석’이 있다.

남영제는 일제강점기인 1935년 축조돼 인근 농경지에 용수를 제공했다. 또 동편에 ‘바우등’이란 곳이 있는데 물이 흐르는 계곡 가운데에 커다란 암반이 20여m 펼쳐져 있어 예날에는 아이들의 물놀이ㅏ용 미끄럼틀이 되었으며 남자 어른들에겐 목욕터, 마을 여인들에겐 빨래터가 되었다. 이 곳의 물은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아 고부 소재지 인근 마을의 많은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러 왔다고 한다.

당산입석에는 재밌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마을 사람들은 이 입석을 ‘할머니 돌’이라고 부르고 옆쪽의 당산나무를 ‘할아버지 당산’이라 부른다. 원래 입석이 있었던 곳은 현재보다 위쪽으로 마을 가까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말에 둑을 쌓고 저수지를 만들면서 아래쪽으로 옮겨졌다가 1960년대 새마을사업 당시 도로를 확장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겨졌다. 

마을에 있는 두승산 미륵암에는 예로부터 신령스런 부처님이 있다고 구전된다. 

이 미륵암은 호남 삼신산 중의 하나인 두승산 서쪽 산중턱에 위치한 천년고찰이다. 

신라 선덕여왕 5년인 636년 자장선사가 중국 청량산에서 불도수행 기도하던 중에 두승산 미륵부처를 꿈 속에서 본 후 수행을 마치고 643년에 귀국해 두승산 부처에 참배하고 산세의 수려함에 감탄을 자아내며 좋은 기운을 따라 절을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 이 곳에 있는 석불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 지금의 불상은 634년에 있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본다.

지금의 두승산 미륵암은 1850년 고부 처사의 현몽이 영험해 미륵부처를 위한 미륵전을 짓고 1895년에 ‘내춘선사’가 미륵전을 다시 지어 수행하기도 했던 곳이다. 

이후 1960년대 들어 미륵전이 쇠퇴해 시주를 모아 1981년 해체 후 복원했다. 그리고 같은해 4월1일 남복리 미륵암 석불이 지방문화재 99호로 지정됐다. 이 석불은 1m81cm이며 발굴 당시 무릎 이하가 땅 속에 묻혀있었으며 얼굴이나 옷의 주름에서 고려시대 불교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기쁨만 안아주는 미륵부처님이란 이야기도 있다. 

두승산 미륵부처는 마을 백성들의 정신적 귀의처이며 그도 대상이었다.

또 여래사는 원래 행주 은씨의 문중 제각으로 사용됐으나 현재 여래사 주인이 이를 사들여 2002년 5월 개보수 후 법당으로의 역할을 유지하고 있다.

위 서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여래사 주변에는 풍수와 관련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 곳의 형세는 도마뱀과 개구리가 마주한 모습이란다.미륵암 뒤 능선이 도마뱀 형국이고 작은 언덕이 개구리의 모습을 띤다. 이 형세를 본 어느 풍수학자가 “도마뱀이 개구리를 집아 먹을 때 통일이 온다”라고 했단다. 이 이야기는 지금도 마을 주민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내려오고 있다.

또한 마을에는 신라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유선사란 사찰이 있는데 몇차례 중건을 거쳐 조선 말기에는 두승사라 부르기도 했다. 

마을 동편에 행주 은씨 묘역이 있으며 그 곳에 은양덕과 은진사의 묘가 있다. 은양덕의 묘 앞에 있는 비에는 ‘통정대부 양덕현감 행주은공 규섭지묘’라 써있다. 은진사의 추모비에는 ‘고 진사 은성우 불마ᅟᅥᆼ비’라 이름하고 1936년 추모회에서 건립했다.

마을 뒤에는 언양 김씨의 재실인 행정재가 있다. 원래 고부 은진사의 사랑채를 옮겨다 지었더고 전해진다. 그 때문인지 재실 오른쪽에는 누마루가 시설돼 있다. 은진사가 세상을 떠난 후 은진사 소유의 여러 채 한옥은 타 지역으로 옮겨져 갔고 당시의 사랑채는 지금도 언양 김씨의 재실로 이용되고 있다.

언양 김씨 선영의 묘역이 있는 ‘와등’에서는 기와를 굽던 와요지가 발견됐다. 와요지 입구는 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굴뚝이 있는 벙향은 남향을 하고 있다. 와요지 조성시기와 구모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발굴조사가 이뤄지면 향토자원으로서 소중한 가치를 평가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최병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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