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휘신도비(충청남도유형문화재, 디지털논산문화대전)
김계휘신도비(충청남도유형문화재, 디지털논산문화대전)
양천허씨정려(충청남도유형문화재, 문화재청)
양천허씨정려(충청남도유형문화재, 문화재청)
김계휘 문집 황강선생실기(국립중앙박물관)
김계휘 문집 황강선생실기(국립중앙박물관)

 

김계휘는 충청도 3대 명문 연산의 광산김씨로 사계 김장생의 아버지이다. 선조 11년(1578)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이듬해 형조참판이 되어 교체되었다. 연산의 광산김씨는 김장생과 김집, 부자지간에 문묘에 배향된 유일한 집안이다. 김계휘의 후예들에서 김문현 등 여러 명의 전라감사가 나왔다. 

▶충청도 3대 명문 연산의 광산김씨, 회덕의 은진송씨, 이성의 파평윤씨

‘충청도 양반’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충청도는 양반 이미지가 강하다. 이는 조선 후기에  충청도 출신 호서사림들이 정국의 주도적 위치에 있었던 것과 관련되어 있다. 조선후기 중앙진출에서 충청도 출신들의 약진이 두드러지는데, 호서사림들의 정국 주도와 무관하지 않다. 대원군이 3대 병폐로 거론한 것이 충청도 양반, 평양 기생, 전주 아전이다. 괴산에는 근래 둘레길로 조성한 양반길도 있다.

조선 후기 정국을 주도하면서 조선 성리학을 이끈 충청도 3대 명문이 연산의 광산김씨, 회덕의 은진송씨, 이성(노성)의 파평윤씨이다. 연산의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 부자, 회덕의 우암 송시열과 동춘 송준길, 이성의 명재 윤증과 그 아버지 미촌 윤선거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김장생과 김집은 부자간에 문묘에 배향되었는데, 김장생의 아버지가 전라감사를 지낸 김계휘이다. 송시열과 송준길은 할머니들이 자매인 13촌지간으로 18, 19세기 노론 일당 전제정권의 기반을 놓았다. 이성의 윤증은 송시열과 동문수학한 아버지 윤선거의 강화시비(江華是非) 문제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소론의 영수로 자리하였다. 

이들은 산림의 영수로 국정을 주도하였다. 산림이란 벼슬의 높이가 아니라 유림의 추앙을 받아 국정에 지대한 인물들을 말한다. 김장생은 유학, 김집은 진사, 송시열은 생원(장원), 송준길은 진사, 윤선거는 진사, 윤증은 유학이다. 모두 문과 급제자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송시열은 벼슬에 오래 나가 있지 않았지만 좌의정에 올랐고, 윤증은 벼슬에 나가지 않고도 우의정에 올라 백의정승이라고 한다. 서인의 종주인 율곡 이이의 제자가 김장생이고, 김장생의 제자가 송시열과 송준길이다. 

연산, 회덕, 이성은 서로 인접한 지역으로 조선시대에는 각각 독립된 군현이었다. 현재는 연산과 이성은 논산에 속해 있고, 회덕은 대전에 편제되어 있다. 작년에 개관한 한국유교문화진흥원이 논산 노성면에 자리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이 이런 데에 있다. 

▶연산의 광산김씨 가문을 일으킨 양천허씨 할머니

광산은 지금의 광주광역시로 연산의 광산김씨는 광주에서 이주해 왔다. 광산김씨를 명문으로 일으킨 인물로 받들어지고 있는 할머니가 양천허씨부인이다. 김계휘의 6대조 할머니로 김장생으로부터는 7대조 할머니가 된다. 

허씨부인은 개성에서 벼슬살이 하던 남편 김문이 일찍 죽어 17세의 어린 나이에 홀로 되자 친정에서 재가를 시키려고 하였으나 이를 거부하고 어린 아들 김철산을 데리고 개경에서 연산으로 내려왔다. 그 김철산의 아들이 세조대 좌의정을 지낸 김국광이다. 이후 광산김씨 문중에서 많은 유학자들이 배출되어 명문이 되었다. 

은진송씨도 집안을 일으킨 할머니로 고흥유씨부인을 모시고 있다. 남편인 진사 송극기가 일찍 죽자, 친정의 반대에도 어린 아들 송유를 데리고 개경에서 회덕 시댁으로 내려와 가문을 일으켰다. 송시열, 송준길 모두 그 할머니의 후손들이다.

순창의 남원양씨도 집안을 일으킨 인물로 이씨할머니를 받들고 있다. 남편 양수생이 죽자 유복자와 함께 개성에서 시댁이 있는 남원으로 내려왔다가 귀미리에 터를 잡았다. 양천허씨부인, 고흥유씨부인, 이씨할머니를 칭하여 해동삼부인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연산 고정리에는 양천허씨할머니와 김겸광, 김장생 등 광산김씨의 묘역이 있다. 김장생의 묘가 가장 위에 위치하고 있고, 특이하게도 그 아래에 양천허씨할머니와 선조들의 묘가 있다. 묘역 아래 종가댁은 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김계휘의 묘소, 김국광 사당, 양천허씨 정려와 재실 영모재 등이 이 광김 묘역 인근 고정리 일원에 있다. 

순창 인계면 마흘리에 조선의 8대 명당이라고 하는 일명 말명당(馬明堂)이 있다. 여기에 김국광의 아들 김극뉴의 묘가 있다. 김극뉴는 김계휘의 증조부(사계의 고조부)로 대사간을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황희정승의 3자 황보신의 딸이다. 이 명당이 발복하여 광산김씨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고 한다.

▶김계휘, 대사헌을 역임하고 전라감사에 부임

광산김씨 김계휘(金繼輝, 1526∼1582)의 자는 중회(重晦), 호는 황강(黃崗)이며, 아버지는 지례현감 김호(金鎬)이다. 사계 김장생(金長生)이 그의 아들이고, 신독재 김집(金集)은 손자이다. 김집은 좌의정 유홍의 딸과 혼인했으나 자식이 없고 서자만 있어 그 동생이 사계의 대통을 이었다. 김집은 율곡 이이의 서녀를 첩으로 맞았다. 이이도 적자가 없어 서자 이경림이 대를 이었다. 송시열도 적자가 없다. 

김계휘의 현손, 즉 김장생의 증손자가 숙종의 첫번째 장인인 김만기와,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지은 서포 김만중이다. 김만중은 아버지 김익겸이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자결하여 유복자로 태어났다. 김만중은 문과에 장원급제고, 대사헌을 지냈으며, 당쟁의 여파로 남해에 유배되어 죽었다.

김계휘는 1549년(명종 4) 24살 때 식년시 문과에 을과 3위(전체 34명 중 6위)로 급제하고 권지승문원정자에 분관되었다. 벼슬 이름 앞에 권지(權知)가 붙은 것은 임시벼슬이라는 뜻이다. 문과에 급제하면 승문원, 성균관, 교서관 등에 분관하여 실무를 익히고 정식으로 관직에 임용되었다. ‘권세 권(權)’자에는 임시라는 뜻이 있다.   

1555년(명종 10)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예문관 검열(사관), 홍문관 부수찬, 이조 정랑, 홍문관 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1566년(명종 21)에 문과 중시에 급제하고, 승정원 동부승지를 거쳐 사헌부 대사헌에 올랐다. 

선조 즉위 후 사림계의 중진으로서 중망을 받아 이조참의, 예조참의로 임명되었고, 황해도와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575년(선조 8) 동서분당 때 심의겸과 함께 서인에 속했다. 1578년(선조 11) 대사헌에 다시 임용되었다가 그해에 심의겸의 후임으로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이듬해 5월경에 형조참판이 되어 체직하였다. 1581년(선조 14) 조선 왕실의 가계를 바로잡는 종계변무(宗系辨誣) 주청사로 북경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 예조참판에 올라 경연관이 되었다. 

선조 15년 예조참판으로 석강(夕講)에 입시하였다가 갑자기 쓰러져 사망하였다. 『선조수정실록』 그의 졸기에는, “타고난 자품이 영특하고 마음가짐이 화평하였으며 세세한 행동과 예절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먼저 원대한 포부를 지녔기 때문에 수련을 쌓은 공부는 없었으나 소견이 고매하여 은연중 도리에 합치되었다. …”고 하였다. 

박순을 모신 나주 월정서원(月井書院)에 심의겸, 정철, 홍천경 등과 함께 추배되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돈암서원은 김장생,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을 배향하였는데, 김계휘가 학문에 힘쓴 경회당과 김장생이 후학을 양성한 경회당 자리에 건립한 서원이라고 한다.

▶김문현 등 전라감사를 지낸 김계휘의 후손들 

김계휘의 현손(4대손) 김만길, 5대손 김진귀, 6대손 김보택ㆍ김조택 형제, 7대손 김상익, 10대손 김문현, 12대손 김명수 등이 모두 전라감사를 역임하였다. 김진귀는 숙종비 인경왕후의 오라버니 김만기의 아들이며, 김보택과 김조택은 김진귀의 아들이다. 김진귀의 아들 4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김문현은 1893년(고종 30) 3월에 전라감사 겸 전주부윤에 부임하여, 이듬해 황토현싸움에서 동학농민군에게 패해 파직되고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김명수는 음관으로 1896년 전라도가 분도된 후 1903년에 전라북도관찰사를 지냈다. 

이동희 (예원예술대학교 교수, 前 전주역사박물관장)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