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문학마을 석양
아리랑 문학마을 석양
조정래 작가 집필실
조정래 작가 집필실
아리랑문학마을 입구
아리랑문학마을 입구

 

우리 선조들의 등골을 빼먹은 일제의 잔학상과 한민족의 끈질긴 정신력, 고난의 역사를 기록한 소설 '아리랑'이 모티브가 돼 형성된 마을이 김제 아리랑 문학마을이다.

   소설 아리랑은 조정래 선생의 근현대사 3부작 중 도입부에 해당되며 전 세계로 흩어지는 이산의 과정과 민족의 고난과 투쟁을 그린 대서사시로, 김제의 드넓은 평야를 배경으로 시작된다.

  풍요로운 황금 들판에도 남모를 아픔은 숨겨져 있기 마련인데, 일제강점기 시절의 황금 들판은 농민들의 눈에는 그저 누런 빛깔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 당시 우리 선조들의 고단한 삶을 소설 속에 담은 조정래 작가는 "36년간 죽어간 민족의 수가 400만, 2백자 원고지 18,000매를 쓴다 해도 내가 쓸 수 있는 글자 수는 고작 300여만 자"라고 집필 후에 고백했다.

  이어 "조국은 영원히 민족의 것이지 무슨무슨 주의자들의 소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지난날 식민지 역사 속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피흘린 모든 사람들의 공은 공정하게 평가되고 공평하게 대접되어 민족통일이 성취해낸 통일조국 앞에 겸손하게 바쳐지는 것으로 족하다. 나는 이런 결론을 앞에 두고 소설 아리랑을 쓰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아리랑 문학 마을은 일제수탈관, 일제수탈기관, 외리마을, 내촌마을, 이민자 가옥, 하얼빈역으로 구성됐다.

  먼저 당시 민초들을 착취했던 시설들을 둘러봤다.

  일제는 군의 기능 약화와 동리의 자치질서 해체를 목적으로 지방행정단위인 면을 주목했다.  일제를 등에 업은 면장은 우월한 사회적 지위를 활용해 면민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전면에 나서서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해왔다. 면직원의 직위는 최말단에 불과하지만, 행정의 말단 권력에 참여함으로써 자신들의 신분을 보호받고, 사회경제적인 기반을 유지했다.

  일년간 비지땀을 흘리며 농사를 지어도 쌀 한 톨 먹을 수 없었던 농민들은 혹시 정미소에서 일하면 조금이라도 혜택을 받을까 내심 기대했지만, 이도 다 부질없는 노릇이었다. 일제는 예외없이 너무 잔인했다.

  죽산우체국을 지나 당시 악명높았던 주재소에 들렀다.

  1면 1주재소를 원칙으로 조선 전역에 설치된 주재소는 일제의 경찰조직의 일선 최말단 조직이었지만 면에서의 그 위세는 대단했다. 

  주재소의 순사는 탄압과 감시와 억압의 상징이었으며, 우는 아이를 달래는 방법 중에 "왜놈 순사 온다"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첩보수집, 정치사찰, 범죄즉결, 납세독촉, 학교사찰, 국내외 거주이전 통제, 도살단속 등의 권한을 가진 순사는 당시 무소불위의 존재였다.

  만경강과 동진강 사이에 넓게 펼쳐진 김제만경평야는 우리나라 쌀의 40분의 1을 담당하는 곡창지대로 '징게맹게 외배미들'에서의 외배미들은 너른 들 즉 평야를 일컫는다.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소설 아리랑의 주인공들이 살았던 집을 재현해 놓은 초가들이 이어진다.

  당시 수탈기관 외에 우리 선조들을 옥죄었던 존재는 또 있었으니 일본 지주들이었다. 자국에서 별볼일없던 일본인들은 한반도로 넘어와 일제의 수탈에 협조하며 부를 쌓아가기 시작한다.

  하시모토라는 인물도 그 중에 한 명이었다. 경술국치 직후 불하받은 땅을 경영하기 위해 김제로 내려온 하시모토는 김제 죽산면의 대토지 소유주가 된다. 가도 가도 끝이 안보이는 죽산면 전체 농경지의 절반 이상을 하시모토는 본격적으로 수탈하기 시작한다.

  소설 아리랑의 주무대 중 하나인 '하시모토 농장 사무실'은 당시 일본인들에 의한 토지 수탈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패망 후 한국전쟁으로 경제의 기반을 다진 일본, 그 힘으로 언제라도 주변국과 영토마찰을 자초하고 혹 틈이라도 보이면 당장이라도 군사행동을 감행할 수 있는 일본, 자생적인 민주주의를 발전시키지 못해 우익 정치인들의 논리에 쇠뇌당한 위험한 이웃, 강자에 약하고 약자엔 강한 속성을 지닌 일본인들은 발톱을 숨기고 언제라도 다시 역사를 재현할 준비를 하고 있는 듯하다.

  이 땅에 소설 아리랑이 다시 쓰여지는 일이 없길 바라며 끝으로 조정래 작가의 말을 전한다.

  "역사는 과거와의 대화만이 아니다. 미래의 설계가 또한 역사다. 우리는 자칫 식민지시대를 전설적으로 멀리 느끼거나 피상적으로 방치하는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그러나 민족분단의 비극이 바로 식민지시대의 결과라는 사실을 명백히 깨닫는다면 그 시대의 역사를 왜 바르게 알아야 하는지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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