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식 남원문화원 사무장
 

백제의 서동과 신라의 선화공주가 사랑하여 혼인했다는 서동설화의 주인공 서동은 법왕의 뒤를 이어 백제 30대 왕에 오른다. 이때가 600년이다.

기반이 약한 무왕은 정치적으로 이를 타파하기 위한 방편으로 전쟁으로 눈을 돌린다. 고구려와 신라에 빼앗긴 땅을 찾는다는 명분은 전쟁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동기를 부여했을 것이다.

무왕은 즉위 2년 만인 602년 8월, 군사를 이끌고 아막산성을 포위한다. 신라 증평왕은 정예 기병 수천을 보내 백제군의 공격에 맞서게 하여 백제군을 퇴각시키고 아막산성을 주성으로 하여 소타(小陀), 외석(畏石), 천산(泉山), 옹잠(甕岑) 등 4개의 성을 쌓아 아막성의 부성으로 삼았는데 아막산성을 모산성으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무왕은 신라에게 폐하고 돌아왔다는 소식에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거느리고 좌평 해수장군으로 하여금 다시 4성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신라 장군 건품과 무은이 군사를 이끌고 백제군과 맞서 싸우자 전세가 불리해진 백제군은 천산 서쪽의 소택지로 퇴각하며 추격해오는 신라군을 급습하기 위한 복병을 숨겨두었다. 무은이 갑졸 1,000여 명을 거느리고 백제군을 뒤쫓다 매복하고 있던 백제군의 공격으로 말에서 떨어져 위급한 상황에 처하고 신라군이 당황하자 무의의 아들 귀산이 “내 일찍이 스승에게 들으니 군사는 적을 만나서 물러서지 말라고 하였는데 어찌 감히 도망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겠느냐”며 큰소리로 외치며 타고 온 말에 아버지를 태워 돌려보내고 소장 추항과 창을 휘두르며 백제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하였다. 귀산과 추항의 죽음은 신라군의 전의를 불살랐고 결국 신라군의 대승으로 끝난다. 그리고 616년 무왕은 군사 8천명으로 하여금 아막산성을 다시 공격하였지만 실패하고 만다.

이처럼 아막산성을 두고 백제와 신라의 치열한 쟁탈전에는 백제는 대가야 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교두보로 아막산성은 꼭 필요한 군사적 요충지였고 신라에게도 아막산성은 군사적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향후 백제를 공격하기 위한 최적의 방어선이며 경제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지리적 특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신라 화랑의 계율인 세속 5계는 원광법사가 중국 수나라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오자 귀산과 추항이 그를 찾아가 화랑이 지켜야 할 실천덕목을 묻자 사군이충, 사친이효, 교우이신, 임전무퇴, 살생유택이라는 세속 5계의 가르침을 주었고 이는 훗날 화랑도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기반을 작용하였다.

이처럼 아막산성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삼국시대의 유적이다.

1500여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성벽은 허물어져만 간다. 그러나 성벽의 기초는 온전하고 남쪽의 성벽은 복원 가능할 정도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더 이상 원형이 사라지기 전에 허물어진 구간을 다시 복원하여 보존하기 바라는 마음으로 아막산성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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