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 희 (예원예술대학교 교수, 前 전주역사박물관장)

이계맹은 전주와 김제에 살았던 전라도 출신으로 중종 2년(1507) 9월 전라감사에 제수되어 중종 4년 정월에 교체되었다. 그는 생원시와 진사시 양시에 모두 합격하고 문과에 갑과 3등으로 급제한 출중한 인물로, 사화(士禍)와 혼돈의 시대 연산군대와 중종대를 살면서 사림과 갈등하고 또 한편으로 사림을 보호하였다.

▶전주와 김제에 살았던 전라도 출신  
이계맹(李繼孟, 1458~1523)의 본관은 전의(全義)이고, 자는 희순(希醇), 호는 묵곡(墨谷) ㆍ묵암(墨巖)이다. 아버지는 이영(李潁)이고, 어머니는 인천채씨 채소명의 딸이며, 처부는 전주최씨 최한석이다.
전의이씨는 조선초에 두 갈래로 전라도에 자리를 잡게 되는데, 이덕근이 여산송씨와 혼인하여 처향 여산으로 낙향하였고, 이창수가 전주유씨와 혼인해 처향인 전주로 내려와 구이에 뿌리를 내렸다. 이계맹은 여산으로 내려온 이덕근의 후예이다. 이정란, 이상진, 이기경 등은 이창수의 후예이다.
이계맹은 전라도 전주와 김제에서 살았다. 태생지는 여산이라고 한다. 『연산군일기』에 보면, 이계맹이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 문초를 받으면서 자신을 전주에 사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또 그는 이경동, 이목 등과 함께 전주유씨 유일재 유분(遺逸齋 柳?)에게서 수학하였다, 유일재는 세조가 즉위하자 전주 곤지산으로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계맹을 흔히 김제출신이라고 하는데 이는 그만큼 김제와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중종실록』 그의 졸기에, “이계맹의 집은 호남 김제 어느 마을에 있었는데, 가난한 일가들이 살았다. 이계맹이 휴가를 맡아 고향에 가면 가난한 일가들을 모두 자기 집에 불러 모으고 정담을 나누며 있는 것을 모두 기울여 대접하였다. 그가 돌아올 때에는 가지고 있던 물건을 남김없이 나누어 주어 자기가 갖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고 하였다. 그의 묘소도 김제에 있다.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문과 급제
이계맹은 어렸을 때 놀기를 좋아하였다. 어려서 아버지가 돌아가셔 어머니가 직접 공부를 가르쳤다. 공부가 늦었지만 성종 14년(1483)에 진사시와 생원시 사마 양시에 모두 합격했으며, 성종 20년에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생원시와 진사시는 시험 날자를 달리하여, 진사시를 먼저 치르고 하루 이틀 후에 생원시를 설행하므로 같은 해에 양시 모두 합격할 수 있었다. 진사시를 먼저 설행하여 초장이라 하고, 생원시를 뒤에 보아 종장이라고 한다.
이계맹의 과거시험 성적 또한 대단했다. 진사시 1등 3위, 생원시 2등 2위, 문과 갑과 3등이었다. 진사시는 합격자 100명 중에서 3위를 한 것이고, 생원시는 100명의 합격자 중에서 7위를 한 것이다. 문과는 전체 급제자 33명 중에서 3등을 한 것이다. 갑과 1등이 장원, 3등은 탐화랑(探花?)이라고 한다.
그가 문과 급제할 때 전주출신 진일재(眞一齋) 유숭조(柳崇祖)도 동방급제하였다. 유숭조는 사서삼경 언해본을 처음으로 만든 유학자로 이름이 높다.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 고초
이계맹은 성종대 사간원 정언 등 주로 언관직에서 활동하였으며, 성종 23년(1492)에는 어버이를 모시기 위해 고향 인근의 외직을 원하여 고산현감, 청양현감 등을 지냈다.
연산군 4년 무오사화 때 그는 사림의 영수 김종직의 일파로 몰려 곤욕을 치렀다. 이계맹은 「조의제문」을 찬한 김종직의 문인이라는 죄목으로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계맹은 이에 대해, 김종직이 전라감사일 때 전주 도회(都會)에서 1등을 하여 종이와 붓을 받았을 뿐이며, 그 밑에서 수업하지는 않았다고 하여 석방되었다.    
이계맹은 사실 김종직이 전라감사였을 때 부안에서 시를 주고받는 등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전고대방(典故大方)』과 「점필제문인록」에 이계맹이 김종직의 문인으로 나오며, 그가 김일손, 김안국, 김굉필 등 영남사림들과 교류한 것도 김종직과의 인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김종직으로부터 직접 글을 배운 것 같지는 않다. 김종직이 성종 19년에 전라감사에 부임하였는데, 이때 이계맹의 나이는 31살이고 소과를 합격한 이후의 일이다.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와 종계문제 보고
연산군 9년 5월 사헌부 장령으로 복직하여, 연산군 9년 동부승지에 올라 이듬해 무오사화 때 승지 자리에 있었다. 그는 연산군대 폭정하에서 국왕의 비서로서 좌승지까지 올라 승지 박열과 함께 현사(顯士)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중종반정 후 중종 1년 대사헌으로 승진했다. 이듬해 박경(朴耕)의 옥사에 연루되어 전라도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후 죄가 없음이 밝혀져 풀려나 중종 2년 9월 전라도관찰사에 제수되어 중종 4년 정월 교체되었다.
이후 경기감사를 역임하고 성절사로 중국에 다녀온 뒤, 평안감사, 호조ㆍ형조ㆍ예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중종 12년 다시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가서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로 잘못 기록된 것을 발견하고 보고하였다. 이 일로 이계맹은 선조 21년 종계변무가 일단락된 후 광국원종공신 1등에 책봉되었다. 그는 문장력이 뛰어나 외교문서의 작성이나 명의 사신 접대, 외교사절로 활약하였다.

▶중종대 사림들의 배척으로 낙향
이계맹은 중종 14년(1519) 대신들의 천거로 병조판서에 임용되었는데, 도학파 사림들이 부적격자라고 교체를 주장하였다. 그는 결국 병조판서를 사직하고 김제 농막으로 퇴거하였다.
이 일이 있기 전에 사림들이 정몽주와 김굉필을 문묘에 배향하려고 하자 이계맹은 정광필과 함께 정몽주는 가하나 김굉필은 불가하다고 하여 사림들의 미움을 샀다. 조광조를 비롯한 개혁파 사림들과 이계맹 사이에 균열이 생겼으며, 이런 갈등으로 인해 사림들이 그의 병조판서 임용을 반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해 기묘사화가 일어나 기묘명현들이 실각하고 훈신들에 의해 이계맹은 좌찬성에 복직하였다. 훈신들은 사림들과의 갈등이 있는 이계맹을 등원하여 사림세력들을 제압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훈신들의 기대와는 달리 이계맹은 사림들을 보호하였다. 기묘명현인 안당의 손자 안로는 「기묘록보유」를 찬하면서 이계맹을 기묘명현으로 분류하였다.

▶군자다운 유자, 군자유(君子儒)
이계맹은 사화와 혼돈의 시대를 살면서 사림들과의 갈등을 보였고, 사림과 갈등하면서 사림들을 보호하였다. 실록 그의 졸기에 “좋아하고 싫어함이 분명하고 옳고 그름을 잘 분별하는 군자”라고 하였다. 안로(安老)는 「기묘록보유」에서, ‘사림들이 의지하고 존중하던 군자유(君子儒)’라고 하였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전라도에 우거한 유명 인물로 순창의 신말주, 김제의 이계맹, 해남의 이후백, 무안의 임담 등을 꼽았다.
이계맹은 사후에 전주 서산사우, 김제 용암서원, 여산 향현사(鄕賢祠), 논산 봉곡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그의 신도비는 인조 26년(1648) 김제군수 조속이 서둘러 건립하였는데 묘비명은 김상헌이 지었으며 글씨는 명필 조속이 썼다.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