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근 전 전주교육장

아내가 둘째를 낳을 때의 고통을 분만실에서 보았었다. 정확히는 분만을 도왔다. 마지막 힘을 쓰지 못하고 사경을 헤매는 아내를 보며 우리 어머니들이 아이를 낳으러 방에 들어갈 때 벗어놓은 신발을 뒤돌아보았다는 얘기를 실감했다.
그래서 나는 아이 낳는 고통이 세상의 어느 고통보다 크다는 생각을 체험으로 갖게 되었다.

엄마들을 대상으로 한 어느 강연에서 아이 낳는 것이 힘든지 기르는 것이 힘든지를 물은 적이 있다. 20여 명의 참석자들이 한결같은 목소리로 “기르는 것이 훨씬 힘들지요”라고 답했다. 어느 엄마는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아이 기르기가 내가 보았던 출산의 고통보다 더 고통스러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기르는 일의 고통은 결국 출산을 기피함으로 이어지고 저출생 인구소멸의 공포스러운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아이 기르기 힘든 이유가 너무 분명하게 많은 시대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국가적 과제로 삼아도 쉽지 않아서 어느 대통령이 이 문제를 해결한다면 그는 전 국민적, 전설적 영웅으로 칭송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나는 그 원인과 해법을 말하고자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힘들게 낳은 아이를 덜 고통스럽게 키우는 방식에 관한 의견과 아이 기르기에 비견되는 조직 관리에 대한 소견을 말하고자 한다.

학부모의 자녀관을 보면 많은 부모가 아직 미성숙의 자녀를 자신과 일치시키려 한다. 자녀의 생각보다 자신의 생각을 중심으로 자녀를 통제하고 심하게는 폭력을 행사한다. 거의 린치에 가깝고 그러다가 자녀를 죽음에 이르는 경악할 사건까지 만들어 낸다. 역으로 어떤 부모는 심각할 정도로 자녀의 눈치를 살피며 키운다. 한편으로는 그도 저도 어찌할 바 모르고 차라리 방치하는 부모도 있다.

나는 이런 일치형, 눈치형, 방치형 부모에게 자치형 양육을 권한다. ‘보호하되 통제하지 않는 것’ 그것이 자치다. 자치란 자율이고 자기 주도성이다. 지식을 넘어 지혜가 돋보이는 아이들, 성적보다 총명한 아이들을 살펴보면 대체적으로 성장 과정에서 자율성과 자기 주도성이 기반이 된 아이들이 많다. 이런 아이들은 획일성에 갇히지 않아서 능동적이고 호기심과 상상력도 높다. 이 아이들이 예측 불가능한 미래사회에 적응하고 미래사회를 예측 가능하게 할 주역이 될 것임은 불문가지다.
아이의 양육과 함께 조직관리에서도 자치가 답이다.

국가조직의 효율적?효과적 관리를 위해 자치와 분권이 제도화되었다. 여전히 미흡하고 여전히 통제되고 있지만 지방자치의 결과는 각 지역의 상상력을 작동했고 ‘주민의, 주민에 의한, 주민을 위한’ 민주적 사회 토대를 만들어 가고 있다. 삶의 질이 국가 주도 사회보다 높아지고 있음도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시·도지사 시장·군수가 임명자 권력의 눈치보다 선출자 권력의 눈치를 살핌으로 주권자의 존재감을 확인시킨다.

국가 수준 교육과정으로, 교육부 특교사업으로 통제하고 있는 국가주도형 교육에서 자치와 분권은 여전히 요원하다. 중앙집권적 교육 권력은 시·도교육청으로, 교육지원청으로, 학교로 분배되고 각각의 지역과 학교 특성에 맞는 자치가 되어야 한다. 미래사회를 결정할 교육이라 더 절실하다. ‘나를 따르라’는 군사문화적 사고와 결별해야 한다. 획일성은 상상력의 방해물이다. 다원화 사회의 기반인 다양성의 역주행이다. 수직적 획일성은 미래사회를 주도할 교육은 커녕 교육을 미래의 낙오자로 만들 주범이 될 것이다.

질 들뢰즈 (Gilles Deleuze)는 뿌리와 가지와 잎이 위계를 가지며 기존의 수립된 계층적 질서를 쉽게 바꿀 수 없는 수목형 사회와 사고에서 현대적 사유 방식으로의 전환을 주장했다. 리좀(Rhizome)이라는 철학 용어를 통해서다. 리좀은 가지가 흙에 닿아서 뿌리로 변화하는 지피식물들을 표상한다. 수목형과 다르게 뿌리가 내려 있지 않은 지역이라도 번져 나갈 수 있는 번짐과 엉킴의 형상이다. 잔디 뿌리나 고구마 넝쿨일 수 있고, 서로 떨어져 있던 점과 점들의 연결체이다. 권력조직과 예술, 학문, 사회적 투쟁 같은 이질적인 것들을 연결하여 한 덩어리로 만든다(들뢰즈와 가타리의 공저 『천 개의 고원』인용). 이 철학에 대한 인정과 수용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 미래가 불확실한 탓이다.

이제 조직 운영에서 모두를 권력자의 주도에 따르게 했던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라는 속담의 뒤집기가 필요하다. 이 속담은 한 사람의 영웅을 따르라는 구시대적 사고방식이다. 미래사회에 적응하고 그 사회를 주도할 조직 운영은 ”사공이 많아야 배를 산까지 올릴 수 있다“라는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학교로(학생, 학부모, 교사, 학교장, 학교를 품는 마을 모두의 연결체로서 학교) 말하자면 ‘학교장 리더십’이 아니라 ‘학교 리더십이다’. 자율성을 가진 개인의 성장과 그런 개인들의 협치로 성공하는 조직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 이것이 리좀과 같은 현대적 사유 방식이고 사회 모습이다.

줄기가 톱으로 베어지면 가지와 잎, 뿌리까지 전멸하는 수목형에서 개인이건 조직이건 어느 연결선 끊어지더라도 다시 그곳에서 시작하는 생명력 있는 다양체로서 리좀이 되는 것, 그 방법은 개인과 조직의 자치다. 개인 안에도 조직 안에도 여러 사공이 존재한다. 그 사공들을 모두 드러내어 융합과 협치를 만들어야 한다. 자치가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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