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실예찬-무장면-21.2
사진-천리안

고창읍으로부터 서쪽으로 약16km 떨어진 곳에 자리한 무장면은 평야지대도 산간지대도 아닌 비산비야의 형세를 이루고 있으며 1914년 3월 부군폐합령에 의해 고창군에 병합되기 전까지는 무장군의 소재지로 구읍이었다.
사방으로 아산, 성송, 대산, 공음, 해리, 상하면과 경계하고 있으며 인근면의 중심부 역할을 하고 있다.
무장면은 면소재지를 중심으로 사방팔당 도로망이 형성되어 16개리 중 송계리를 제외한 모든리에 지방도나 군도가 통과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한 지역이다. 지방도 796선이 동북간에서 서남권으로 소재지를 경유하여 관통하고 있으며 703호선이 북에서 동쪽으로 역시 소재지를 경유하여 관통하고 있고 군도 4호선이 면소재지에서 남쪽으로 대산면을 지나 전남 영광까지 연결되어 있는 동시에 최근에는 고창-금평간 국도가 일부 개통되어 고창 서부지역의 교통요충지로 떠오르고 있다.
면적은 4만3774km로 군 전체의 7.2%를 차지하고 있으며 논 1만1178km, 밭 1만1469km, 임야1만4322km, 기타 6805km로 구성되어 있으며 문화재로는 사적 제346호인 무장현 관아와 읍성, 지방유형문화재는 무장객사, 무장동헌, 용오정사 그리고 지방문화재 자료로는 무장향교 대성전이 있다.
▲무장면 무장리=무장리는 지방도 796호를 이용, 고창읍에서 서남쪽으로 아산면을 거쳐 공음면 방향으로 약 14km를 도로 표지판에 표기된 ‘무장현 관아와 읍성’이 있는 무장면 면소재지가 바로 무장리다. 면적은 1.04km로 밭 0.44㎢, 논 0.22㎢에 약 60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무장리는 고창군 무장면에 속하는 법정리로 조선 말기 무장군 이동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중거, 정거, 하거, 사죽, 덕림, 고라, 이동, 상성 각 일부를 병합하여 무장리라 하고 무장면에 편입했다.
무장면의 중심부에 있는 무장리는 정거리, 시거리, 하거리, 금정리 등 4개의 행정리와 시거, 정거, 중거, 하거, 솔때거리 등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졌다.
노령산맥의 줄기인 고산에서 시작하여 왕제산, 옥녀봉, 한제산 줄기로 이어진 산들로 둘러싸여 있는 무장리는 무장면 백양리 기슭에서 발원하여 강남리에서 주진천에 합류하는 무장천이 있고 무장천 지류에는 선동천, 월계천, 학천천, 정동천, 대산천, 궁동천, 송현천, 강남천, 고라천, 죽산천, 죽청천 등이 있다. 최종 강남리에서 주진천으로 합류하며 주변에는 고라저수지가 논을 관류하면서 망치산을 끼고 돈다.
◇무장읍성=한창 복원공사가 진행 중인 무장읍성은 전체둘레가 1400m에 이르며 안에는 객사, 동헌, 진무루(남문) 등의 옛 건물이 남아있다. 1915년에 발간된 무장읍지에 따르면 조선 태종 17년(1417)에 병마사 김저래가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2만여 명을 동원하여 그해 2월부터 4월까지 만 4개월 동안에 축조했다고 전하고 있다.
◇무장객사(유형문화재 제34호)=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무장객사는 선조 14년(1581)에 건립된 것으로 건물 중앙부 본관을 중심으로 좌우양측에 부속건물이 있다. 중앙부에 본관 3칸과 좌우 양 부속건물은 4칸으로 돼 있다. 객사높이는 82cm의 석축위에 세워졌으며 건물전면에는 역시 석축을 쌓고 여러 가지 수모고가 화초를 심어 정원을 꾸몄다.
좌우 양측 건물의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처마는 부연을 달지 않은 홑처마 형식이고 기둥은 두리기둥이다. 한 개의 석재를 초석으로 아랫부문은 네모지게, 윗부문은 반구형으로 다듬어 사용했으며 가구 수법은 1개의 목재를 다포형식으로 조각하여 사용했다.
◇무장동헌(유형문화재 제35호)=조선 명종 20년(1565년)에 세워진 건물로 알려진 이 동헌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처마는 부연이 달려 있는 겹처마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기둥은 모두 두리기둥을 사용했는데 그 길이가 매우 높아서 건물 자체가 장중한 느낌을 준다. 공포는 주심포와 익공이 결구되어 사용되었다.
▲무장면 교흥리=교흥리는 지방도 796호를 이용, 고창읍에서 서남쪽으로 아산면을 거쳐 공음면, 법성포 방향으로 약 12km 거리에 있다. 남쪽으로는 성내리 내동, 동쪽으로는 원촌, 서쪽으로는 한재산 줄기인 석산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교흥리는 본래 일동면 지역인데 1914년 교촌, 궁동, 덕흥, 월구, 내동 등을 병합하여 그 중심 마을인 교촌과 덕흥에서 교흥이라는 이름을 따오고 무장면에 편입됐다.
자연부락으로는 교흥리에 으뜸가는 마을로 향교가 있는 생기교촌, 생교 남쪽에 있는 마을로 충현사가 있는 서우내, 서우내 동쪽 길가에 무장향교 하마비가 있었던 마을 하마등, 새요 북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활처럼 생겼다는 궁동, 생교 동쪽에 있는 마을인 동교, 하마등 북동쪽에 있는 마을 유도리 등이 있다.
교흥리는 1500년경에 광산김씨에 의해 형성되었고 풍수지리학상 뱀 모양의 사주혈이라고 하여 용호마을로 불렸다. 조선 세종 2년(1420)마을 뒤에 향교가 설립되어 예의범절과 행동이 다른 마을 사람들에 비해 모범이 된 곳이다. 향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교촌 또는 생기촌이라 불렸으며 일제강점기인 1949년 지방자치법 시행에 따라 교흥리라 개칭되었다.
◇무장향교=무장향교지에 의하면 세종 2년(1420)에 무장현 이동면 교흥리 현 위치 좌상방에 향교를 창건하여 공자를 주향으로 안자, 증자, 자사, 맹자를 배향하고 주염계, 정명도, 정이천, 주회암, 홍유우, 문창후, 문선공을 종향하여 춘추중월 상정 자시에 배향하였다.
본 향교는 창건 이후 후진 양성의 교육도장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유림의 정성과 정부의 지원으로 무수히 개보수하고 보존해 1985년에 지방문화재 자료 제107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향교내에는 대성전, 명륜당, 동제 및 서제 등 4동의 건물이 있다.
◇충현사=고창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사우이고 유일한 사액 사우이다. 대대의 서원 사우가 후손이 있어 유림과 함께 유지, 운영하는데 충현사는 창건부터 대동훼철 뒤 중건에도 사림의 성열로 이루어졌고 전후 수백년 동안 수시보수하여 보존 만전을 기했는데도 불구하고 건물이 퇴락하여 사판을 교궁에 이안했다.
◇무장향교 은행나무=이 나무는 1982년 9월 고유번호 9-14-4 보호스로 지정받았으며 426년의 수령으로 높이는 20m, 둘레는 5.0m이다. 은행나무는 우리민족의 정신사상적 흐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유교와의 인연이 깊다. 운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으로 불릴 만큼 오랜 시간 인류와 함께 해온 나무로 1속 1종으로 인척이 없는 외로운 존재이며 수나무와 암나무로 구분되지만 일반인은 구분하기 어렵다.
유독 서원, 고택, 정자, 성균관, 향교 같은 유교 관련 유적지에 오래된 은행나무가 많은데 이는 공자의 가르침에서 유래된 행단에서 그 유래를 찾고 있다. 암수 나무가 구별되듯이 음양오행의 도리를 알게하고 은행의 씨가 둘로 나뉘지 않고 하나인 것은 충성과 지조의 상징이며, 은행나무는 벌레가 침범하지 않듯이 유생들이 향교에서 공부하여 입신출세 하더라도 부정부패에 물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심었다고 한다.
/고창=신동일기자․sdi@

무장면장 인터뷰-고운기 면장
우리 무장면은 무장읍성과 조선시대의 관아, 무장향교 등 호남 천년의 역사가 고이서린 유서 깊은 문화유적의 고향이며 동학혁명의 숭고한 민족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입니다.
특히 2600ha 황토 땅을 배경으로 이곳에서 생산된 고품질 스테비아 쌀과 수박, 메론, 고구마, 복분자, 고추 등의 특산품이 청정 친환경농산물로 전국 최고의 농업브랜드로 성장하고 있으며 이를 토대로 대한민국 농업을 선도하는 여건과 역량을 갖춘 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무장읍성 복원사업이 완료되면 주변의 경관농업지구, 먹거리촌, 숙박시설 등의 지역개발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문화유적과 연계된 관광명소로 자리메김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울러 유서 깊은 역사와 문화를 배경으로 충효의 고장으로 거듭나고 농업경쟁력을 바탕으로 높은 농가소득을 창출함으로써 돌아오는 농촌, 아름답고 청정한 명품 무장으로 발전해 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모쪼록 가족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천년의 향취와 호남 제1의 미향을 체험하시고 인생에서 가장 기억이 남는 소중한 추억을 이곳에서 쌓아가길 기대합니다.
/고창=신동일기자․sdi@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