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부안 줄포면은 부안군 동남부에 있는 면으로 면소재지는 줄포리이다.
 
 대부분의 지역이 500M 이하의 낮고 평탄한 저산성산지를 이루며, 남서쪽은 서해의 곰소만에 면해 있다.
 
 연 중재·월평제·선양제 등 곳곳에 소규모의 관개용 저수지가 많고 주요농산물은 쌀·땅콩·무·배추·수박 등이며, 줄포리에는 상업이 발달했다.
 
 줄포항은 지금은 폐쇄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는 150척 이상의 배를 정박할 수 있었던 서해3포 중의 하나로 이 항을 통해 호남지방의 쌀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김제-고창을 잇는 국도가 면의 서부를 남북방향으로 지나며, 현재 서해안고속도로가 면의 중부를 통과하고 있으며, 줄포·장동·우포·신·난산·파산·대동 등 7개 마을이 있다.
 
 줄포면 마을 이야기
 
 각동마을은 줄포 시내권의 외곽을 끼고 있는 순 농사 마을로 보안면과의 경계 마을이기도 하다.
 
 마을의 형성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서기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난을 피하기 위하여 인근 고부, 흥덕, 보안 면 등 각처에서 피난민 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삼삼오오 자리를 잡으면서 부 터이다.
 
 구전에 의하면 당시 이 일대는 수목이 우거지고 폐허 된 농토였으며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드나들고 이 주위는 갈대밭으로 되어 있었는데 사람들이 이를 개간하여 농사에 종사하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
 
 관동마을이 유래는 약 250여년 전에 조씨 성을 가진 분과 한씨 성을 가진 분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옛날 우리 선조들이 쓰고 다니던 갓을 만들고 망건을 만들면서 생활했다 하여 인근 주민들이 마을 이름을 갓 골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그 후 갓 관 자와 고을 동자를 써서 관동이라 부르게 됨.
 
 동 파산·서파산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 년 전에 풍천임씨와 김해 김씨 두 사람이 마을에 정착 번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구전에 의하면 마을에 수많은 뱀이 살아 이 지역에다 묘를 쓰면 묘 속에 뱀이 살았다 하여 아예 마을 근처에는 묘를 쓰지 않았다고 전했다.
 
 근처에는 흉측한 뱀 때문에 사람이 살 수 없다고 하여 사람들이 살지 않았으나 어느 날 명필 이삼만 이라는 분이 이 마을에 들리어 뱀막이 글씨를 써서 마을 구석구석에 붙였더니 뱀들이 마을에서 없어졌다 하여 지금까지도 이러한 풍습이 정월 달 뱀 날이면 이삼만, 홍사, 청사, 백사, 운사 등의 부적을 붙이는 관례가 이어지고 있다.
 
 선양마을은 서남쪽으로는 서해바닷가 보이고 동남쪽으로는 감동마을과 접해 있는 순 농사 마을이다.
 
 마을은 최초로 경주 김씨가 임진왜란을 피하려고 정착하여 소규모 전작을 주업으로 하는 전작마을로 형성되었다가 후에 생업수단으로 바다를 막아 간척지를 만들면서 미곡이 주산물인 순 농사 마을로 전환되었다.
 
 마을 형성 유래는 조선조 중엽 때 어는 대사가 이 마을을 지나면서 지형이 소의 형국을 이류고 있는데다 바다를 접하고 있는지라 소우자와 바 다해 자를 붙여 소 해라 칭하였다고 한다.
 
 신성마을은 마을 서편에 암탉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과 같은 금계포란의 명당 터가 있었다고 전하는데 어느날 변산에서 노승 한 분이 시주하러 다니다가 해는 저물고 갑자기 난데없는 소나기를 만나 헤맬 때 마음씨 착한 농부 한 분이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노승을 집으로 모셔 식사를 대접하고 비를 피하게 하니 날이 밝아 노승께서 이 마을을 떠나면서 금계포란의 명당 터를 가르쳐 주면서 닭의 알 터에 집을 짓고 살면 부귀를 누릴 것이라고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 뒤 농부가 그 곳에 집을 짓고 사니 천석꾼의 부자가 되었다고 전하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이 집터가 논으로 변해 있다.
 
 또한 마을 앞의 산이 용의 몸과 흡사하다 하여 닭 계 자와 용용 자를 써서 계룡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다가 현 신성이라 부르게 됨.
 
 연정마을 은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전 연안 차씨 일가족이 천대산 주령을 따라 내려오다 지금의 연정이 남생이 등이라 하여 자리를 잡으면서부터 이다.
 
 구전에 의하면 마을 앞에는 마을 이름과 관계가 있는 연 방죽이 있어 매년 화려한 연꽃이 만발하여 마을의 운치를 자랑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는 마을 형태가 남생이와 같다 하며 형국으로는 연꽃 밑에 남생이가 노는 형태라 하여 마을 이름을 남생이 등이라 했다.
 
 그 후 마을 앞 연 방죽에 연꽃이 만발하면 마을에 풍년이 들었고 연꽃이 성하지 못하면 각종 재앙이 있고 흉년이 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이름을 련 자와 물 가정을 합하여 연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용암마을은 어느날 약수터에서 원인 모르게 사람이 죽은 후로 마을에서는 귀신이 들렸다 하여 약수터를 폐쇄하였는데 지금도 물은 흐르고 있으나 이용객은 한 사람도 없는바 마을 사람들은 바위 속이 텅 비어 그 속에는 물이 고였다가 흐른다고 생각하였는데 지금도 바위 위에 올라가 발을 구르면 마치 빈 독에서 나는 소리같이 동동 소리가 나는 데서 유래하여 항아리옹자와 바위 암자를 써서 옹암이라 칭하였다.
 
 원동마을은 원제라는 저수지가 있어 마을 앞 대포들까지 바닷물이 드나들고 대포 주위는 갈대밭으로 되어 있어 인근 농경지를 경작하는데 소류지의 필요성을 느껴 마을 주민들의 염원으로 만들었다 하며 소류지가 생기면서부터 마을 앞들은 물론 대포들 일대까지는 농업 용수로 사용하여 농사를 지을 수 이었다.
 
 지형적으로 원장동, 화전, 십리 마을로 둘러 싸여 있고 밭이 많은 마을이다.
 
 율지마을은 마을에 장자 못이 있었는데 이 못의 유래가 유명하게 전래하여 오고 있다.
 
 지형이 밤 형국을 닮았다 하여 밤 율 자와 장자 못이 있다 하며 못 지자를 합하여 율지라는 마을명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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