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영정
▲ 관수정

송흠은 전라도 영광(현 장성) 출신으로 여산부사 시절 ‘호산춘’ 술을 빚어 전승시켰으며, 지방관으로 나갈 때 말 세 마리만 받아 부임했다고 하여 ‘삼마태수’로 불렸다. 청백리로 이름이 높으며 부모 봉양을 위해 주로 전라도에서 지방관을 지냈다. 중종 28년(1533) 전라감사에 임용되었으며, 86세의 나이에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관수정’과 ‘기영정’ 유적이 있다. 

▶ 전라도 영광 출신 
송흠(宋欽, 1459~1547)의 본관은 신평이고, 아버지는 문소전 참봉 송가원(宋可元)이다. 전라도 영광 출신으로,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전남 장성군 삼계면 주산리 정각마을이 그 태생지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영광에 속했던 이 마을이 장성에 편입되었다.   
그의 자(字)는 흠지(欽之)이고, 호는 지지당(知止堂)ㆍ관수정(觀水亭)이다. 지지당의 '지지(知止)'는 '그칠 줄을 안다'는 것이다. 노자 『도덕경』에 "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춤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라고 하였다. 기묘사화 후 스스로 지지당이라고 호를 지었다. 관수정의 ‘관수(觀水)’는 “맑은 물을 보고 나쁜 마음을 씻는다”는 뜻이다.
송흠은 장성군 삼계면 시냇가에 정자를 짓고, ‘관수정(觀水亭)’이라는 편액을 걸고 한가로이 만족해 하면서 말년을 보냈다. 관수정 건너편에는 전라감사 송인수가 왕명을 받들어 송흠의 뜻을 숭상하고 장려하는 의미로 지어준 정자 ‘기영정(耆英亭)’이 있다. 

▶ 부모 봉양을 위해 전라도에서 벼슬
송흠은 성종 11년(1480) 22살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종 23년 34살 때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연산군의 폭정으로 퇴임하였다가 중정반정 후에 다시 벼슬에 나와 중종 1년 홍문관 정자에 임명되었으며, 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늙은 부모 봉양을 위해 여산군수, 전주부윤, 담양부사, 광주목사, 나주목사, 장흥부사, 남원부사 등 주로 전라도 지역의 목민관을 지냈다. 
중종 27년(1532) 장흥부사로 있을 때 청백리로 녹선되었는데, 실록에 사관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송흠은 매양 늙은 부모를 위하여 지방 수령으로 나아가 봉양하느라 1년도 조정에 있지 않고 호남의 7∼8 군현과 주부(州府)를 돌면서 다스렸다. 모두 공평과 염간(廉簡, 단순하고 간솔함)으로 임하였기 때문에 많은 치적이 있었으며, 아전과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사랑하였다.”

▶ 75세에 전라감사로 부임
그가 전라도의 목민관을 두루 역임하고 전라감사에 오른 것은 중종 28년(1533) 5월로 그의 나이 75세 때이다. 매우 늦은 나이이다. 한 달 뒤 그가 부임 준비를 마칠 무렵 전라도를 포함한 하삼도에 큰 가뭄이 들어 논의가 분분했다. 비가 올 조짐이 없고 밀과 보리 이삭이 여물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금년에도 추수를 못하면 곡식이 귀해 사기도 어렵다고 하며, 추수를 못할 경우  은을 캐게 해서 세금을 받아들여 부족한 것을 보충하자는 등 여러 의논이 일었다. 어염(魚鹽)을 판매하자고도 하고 각 군현에 저장된 면포를 팔아 곡식을 사들이자고도 하였다. 중종은 가뭄 걱정으로 음식이 목에 넘어가지 않는다며, 전라감사로 부임하는 송흠에게 기근책을 신신당부하였다.
이듬해 2월, 그의 나이 76세일 때 모친이 99세로, 곁에서 모시게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사직을 청해 체직되었다. 실록에 사관이 평하기를, “송흠의 나이가 지금 76세인데, 기력이 강건하며 총명이 줄어들지 않았고, 어버이를 정성으로 받들어 모시며, 관(官)에서는 청렴하고 근심하며 자기 몸은 검소하게 가져 늙어서도 그 지조를 고치지 않으므로 사림(士林)이 탄복하였다.”고 하였다.

▶ 낙향하여 판중추부사에 오름
송흠은 전라감사를 사직하고 낙향하여 늙은 어미를 3년간 간호하였다. 이후 중종 33년 80세에 한성부 좌윤에 제수되고, 이후 공조판서, 의정부 우참찬에 올라 중종 36년 83세 때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중종 39년(1544) 86세 때 고향에 있으면서 종1품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어, 극진히 예우되는 영광을 누렸다. 전라감사 송인수는 그를 위해 기영정에서 큰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송흠의 어머니는 100살이었다. 당시 실록의 기록에 도내 재상출신 중에 소탈하고 담박한 사람으로 송흠을 제일로 쳤고, 박수량을 그다음으로 친다고 하였다.
중종 39년 판중추부사로 고향에 있으면서 전투용 함선인 판옥선을 수군의 주력함으로 실전 배치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그의 주장은 후에 실현되었다. 그는 고향에 기거하면서 양팽손을 비롯해 호남사림의 여러 거목들을 배출하였다. 천수를 다 누리고 89세에 졸하였으며, 영광 수강사(壽岡祠)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그의 묘소는 장성군 삼계면 관수정 뒷산 선방산에 있다. 

▶ ‘삼마태수’로 불린 청백리
송흠은 ‘삼마태수(三馬太守)’로 불렸다. 그의 청렴함을 상징하는 말이다. 지방관으로 부임하거나 퇴임할 때 보통은 말 8마리를 받는데, 송흠은 말 세 마리만 받았다는 것이다. 한 필은 본인이 탈 말, 어머니와 아내가 탈 말이 각각 한필, 그래서 총 3필이다. 이에 사람들이 송흠을 삼마태수라 불렀다.
다산 정약용이 지은 『목민심서』에도 이 이야기가 실려 있다. “효헌공 송흠이 수령으로 부임할 적마다 신영마(新迎馬) 3필뿐이었으니, 대개 공이 타는 말이 1필, 어머니와 처가 각 1필씩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삼마태수라 하였다.” 신영은 지방관을 맞이하는 것을 말한다. 다산이 이를 수록한 것은 목민관들이 송흠과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청백리로 여러 차례 뽑혔다. 장흥부사 때 청백리로 녹선되면서, 실록에 기록되기를, “조정 사람들 중에도 염퇴(恬退)하는 사람이 많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어릴 때부터 늙을 때까지 행실과 지조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기 때문에 아뢰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중종은 송흠을 가선대부로 올려주고, 청백리의 자손을 서용하는 일을 이조에 명했다. 염퇴는 명리(名利)에 뜻이 없어 벼슬을 내놓고 물러나는 것이다. 

▶ 여산부사 때 ‘호산춘’ 술 주조
전라북도 무형문화재에 여산의 호산춘(壺山春) 술이 있다. 이 전통명주 호산춘 술을 송흠이 중종 10년(1515) 여산부사로 부임하였을 때 빚어 전승시켰다고 한다. 『연려실기술』에 삼마태수 이야기와 함께, “송흠이 여산 군수가 되었을 때, 고을이 큰길 옆이어서 손님은 많은데 대접할 것이 없어, 특별한 방법으로 술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호산춘’이라 했다.”고 수록해 놓았다. 
서유구가 『임원경제지』에 전통 명주를 11가지로 구분하고, 그 중 두 번째 술 종류로 주류(酎類)를 수록해 놓았는데, 그 주류의 첫 번째에 호산춘방이 소개되어 있다. 그의 문집인 『지지당유고’(知止堂遺稿)』에는 호산춘 주조법이 한문과 한글로 기록되어 있다. 이전부터 전해오던 호산춘 술을 송흠이 여산부사로 있으면서 대대적으로 빚어 널리 알린 것이 아닌가 한다.  여산의 호산춘 술은 현재 가람 이병기선생 집안을 중심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동 희 (예원예술대학교 교수, 前 전주역사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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