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장산에서 발원한 만경강 물줄기가 봉동읍 윗장터 멍에방천에서 휘돌아 간다. 물줄기처럼 휘몰이장단으로 농악대들이 봉동씨름대회 개막을 알린다. 씨름대회는 초저녁 애기씨름부터, 중씨름, 상씨름 세 가지로 나누어 밤 11시까지 진행된다. 애기씨름은 10살 미만 아이들, 중씨름은 20세 미만 청년들, 상씨름은 20세 이상 남자들로 제한이 없다. 밤 11시에 상씨름 최종 승리자가 결정되면 농악대를 앞세워 우승자 마을까지 풍악을 울리며 행진을 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봉동씨름을 제패한 임병용씨(82)의 진술이다. 임씨 진술에 따르면 봉동씨름은 원래 음력 7월 15일 백중절 만두레 기간에 시행됐다. 만두레는 벼 논의 세벌 김매기를 마무리하는 것을 말한다. 농경시대에는 벼가 뿌리를 잘 내리고 포기를 번질 수 있도록 세 차례 김매기를 했다. 일 년 농사 중 가장 중요한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이 때 호미씻이(洗鋤宴, 세서연) 잔치판을 벌인다. 백중놀이 가운데 가장 절정을 이루는 것은 씨름판이다.

  백중절 놀이는 봉동장날인 20일 하루 동안 벌어졌다. 낮 동안에는 봉동 각 마을의 농악대들이 지신밟기를 하며 멍에방천 당산나무 아래에서 당산제를 올렸다. 저녁에는 씨름대회를 진행한다. 가장 관심을 끄는 상씨름의 경우 장사가 모래판에 버티고 서서 세 번째까지 도전을 받아 우승자를 가리는 방식이다. 상씨름 우승자에게는 주최 측이 황소 한 마리를 상품으로 수여한다. 경비에 따라 황소가 송아지나 염소로 바뀌기도 했다. 우승자는 이튿날 황소를 팔아 그 돈으로 고산천 모래밭에 차일을 쳐놓고 잔치판을 벌인다. 

  원래 씨름은 원시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몸을 단련해서 야수나 외부침입으로부터 공동체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하늘에 제를 지낼 때 맨몸으로 싸우는 행위 즉 씨름을 의식에 포함시켰다. 이것이 세월이 흐르며 세시풍속으로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우리 역사기록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길림성 집안현의 고구려 각저총고분벽화이다. 씨름판 상대는 서역인이며, 노인이 당산나무 아래에서 심판을 본다. 이들은 신성한 장소에서 씨름으로 제사의례를 치른다. 이는 서역인을 물리침으로써 불사의 세계, 서왕모의 세계로 사자를 보내려는 염원을 나타낸다고 한다. 

  봉동씨름은 우리의 전통적인 씨름놀이의 중요한 요건을 갖춘 귀중한 무형문화재이다. 첫째 씨름이 죽은 자의 혼을 달래고 악귀가 발동하는 것을 짓누른다는 의식이 뚜렷하다. 멍에방천은 조선시대 고산현의 사형집행 장소이다. 임병용씨는 정확하게 이 같은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또한 씨름이 열리기 전 낮에 당산제를 지내고, 대회 도중에도 축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풍물이 끊이지 않는다. 밤에 대회를 여는 것도 고유의 전통을 이어받는 것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백중절에 열린다는 점에서 농경문화의 대표적인 세시풍속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멍에방천이 홍수 때마다 터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비보풍수도 담겨 있다. 씨름이 애기씨름, 중씨름, 상씨름 세 가지 형태를 유지하는 것도 전형적인 전통씨름이다.  

  봉동씨름은 봉동장날에 열리는 백중난장 가운데 열린다. 백중절이 다가오면 1개월 전부터 봉동난장 주최 측에서 시장 상인들을 찾아다니며 씨름판에 내놓을 상품들을 접수받는다. 상점마다 생활물품을 내놓거나 돈을 내놓기도 한다. 한마디로 백중걸립(百中乞粒)을 하는 것이다. 요즘에는 봉동체육회에서 봉동 백중난장 씨름을 주관하고, 지역유지들이 낸 기부금으로 물품을 구입하여 상품을 수여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다. 원래 봉동씨름은 봉동체육회가 주인이 아니라 봉동장터 사람들이 주인이었다. 

  봉동씨름은 송화섭 중앙대학교 교수의 초기 조사 단계에서도 전통성을 강하게 유지해온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역사학자들이 정확히 조사하고 백중절에 온전하게 계승 발전시키는 방안을 마련할 수 있도록 완주군과 전라북도 무형문화 당국은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봉동씨름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공동체 문화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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