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희(예원예술대학교 교수, 前 전주역사박물관장)

중종대 사림파의 개혁정치라고 하면 으레 조광조를 떠올리지만, 조광조와 결을 달리하면서 개혁정치를 주도한 또 한 축이 김안국ㆍ김정국 형제이다. 중종조 기묘사화 때 조광조와 함께 화를 당한 기묘명현으로 형인 김안국은 중종 14년(1519)에, 아우 김정국은 중종 33년에 전라감사를 역임하였다. 이들은 감사로 있으면서 또 문인관계로 전라도 향촌사회의 교화와 사림학풍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진사시와 생원시 합격하고 문과 급제
김안국(金安國, 1478~1543)과 김정국(金正國, 1485~1541) 형제의 본관은 의성이다. 증조부는 김통, 조부는 김익령으로 고위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모두 문과에 급제하고 각각 예조정랑과 이조정랑을 지냈다. 아버지는 예빈시 참봉 김연(金璉)이다. 문과자가 연이어 나온 대단한 집안이지만, 이 가문이 크게 빛난 것은 김안국형제 때이다.
김안국의 자(字)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ㆍ은일(隱逸)이다. 나이 20세가 안되어 부모를 여의자 ‘모재(慕齋)’라고 자호를 정하고 돌아가신 부모를 정성을 다해 섬겼다. 한훤당 김굉필의 문인으로 연산군 7년(1501)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이어 생원시에 1등 2위(합격자 100명 중에 2등)로 합격하였으며, 연산군 9년 별시문과에 을과 1등[亞元]으로 급제하였다. 중종 2년(1507)에는 관리들을 대상으로 보는 중시에도 급제하였다.
김안국의 아우 김정국의 자(字)는 국필(國弼), 호는 사재(思齋)ㆍ은휴(恩休)이다. 10세와 12세에 부모를 다 여의고, 이모부 조유향에게 양육되었다. 김정국도 김굉필의 문인이다. 중종 2년(1507) 진사시에 2등 25위로 합격하고 이어 생원시에 1등 4위로 합격하였다. 중종 4년에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중종 9년에 사가독서하였다.
 
▶김안국, 전라감사 재임 중 기묘사화로 파직
김안국은 사헌부 지평, 예조 참의, 승정원 승지, 경상도관찰사, 의정부 참찬 등을 지내고 중종 14년 4월에 전라감사에 제수되어 6월에 부임하였다. 그해 11월에 전라도관찰사 겸 전주부윤에 임용되었으며, 같은 달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12월에 파직되고 이듬해에 이임하였다.
그는 전라감사로서 경상감사 때와 마찬가지로 학교를 일으키고 향약을 설치하는 등 향촌교화에 힘썼다. 향촌교화의 기본으로 삼은 것은 『소학』 책이었다. 사회교화서로 『소학』을 중시한 것은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사림들에게 『소학』은 어린아이만이 아니라 어른도 곁에 두어야 하는 책이다. 한훤당 김굉필은 자신을 ‘소학동자’라고 하였다.
김안국은 전라감사를 역임하고 문인으로 인연을 맺어, 조선초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등과 함께 호남의 학풍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대표적인 호남의 문인으로는 하서 김인후와 미암 유희춘을 꼽을 수 있다. 김인후는 10세 때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김안국을 찾아가 『소학』을 배웠으며, 유희춘은 김안국이 기묘사화로 향촌에 물러나 있을 때 찾아가 공부하였다.
김안국은 기묘사화 때 파직된 후 경기도 이천으로 낙향하여 20여년을 보내고 중종 32년(1537)에 김안로 등이 처단된 뒤 다시 조정에 나왔다. 이후 예조 판서, 대사헌, 병조 판서, 대제학, 찬성 등을 역임하였으며, 기묘 사림의 복권에 힘썼다. 그는 벼슬이 종1품 좌찬성에 이르고, 문형(文衡, 대제학)을 지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고 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김안국은 중종대 사림파 개혁정치의 핵심 인물이지만 조광조와는 그 결을 달리했다. 조광조가 급진적 개혁의 길을 간 것에 반해 김안국은 점진적 개혁의 길을 갔고. 조광조가 중앙정치의 개혁에 주력한 반면에 김안국은 향촌사회의 교화에 힘썼다.

▶김안국, 병조판서 때 태지를 만들어 진상
전라도는 종이의 고장이고, 그 중심이 되는 곳이 전주이다. 이런 전주한지의 역사에 보면 태지가 나온다. 일제강점기에 전주 좁은목 앞 전주천에서 태지를 뜨는 그림엽서도 전한다. 그런데 김안국이 태지를 만들어 바쳤다는 기록이 『중종실록』, 중종 36년(1541) 가사에 나온다. 태지의 역사와 관련해 주목된다.
김안국은 병조판서 때 태지(苔紙) 5속(束)을 만들어 진상하였고, 그러면서 아뢰기를, "신이 시골에 있을 때에 고서(古書)를 보니 물이끼[水苔]로 종이를 만든다는 말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신이 시험삼아 만들어 본 것입니다. 이끼로 종이를 만드는 법은, 닥나무[楮]에 이끼를 섞어서 만드는 것으로, 이끼가 어린 것에는 닥나무를 조금 더 넣고 이끼가 센 것이면 닥나무를 매우 적게 넣어도 좋은 종이가 됩니다. 만약 각도에 하유(下諭)하여 공사(公私)간에 통행하게 한다면 반드시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중종이 조지서(造紙署)에 내려 태지를 만들게 하였다.

▶김정국, 기묘사화 후 전라감사 역임
김정국은 이조정랑, 사간원 사간, 승지, 황해도 관찰사를 지내고 기묘사화로 삭탈관직된 후 경기도 고양(高陽)에 내려가 ‘팔여거사(八餘居士)’라 칭하고 학문을 닦았다. 낙향하여 시골에 살 때 형인 김안국은 농장을 일구고 살은 반면 아우 정국은 빈한한 생활을 이어갔다. 
중종 32년에 복직되어, 이듬해 4월 전라감사에 제수되고 5월에 전라도 전주 임지에 도임하였으며, 1년여를 재임한 후 중종 34년 5월에 병조참의로 체직되어 7월에 이임하였다. 전라감사 재임시절 사헌부에서 전라도 중들의 포악함이 습성이 되었다고 하며 이런 사항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이를 척결할 것을 주청한 일이 있었다. 사헌부에서 또 정읍현 내장산의 영은사와 내장사가 도적 승의 소굴이므로 철거할 것을 건의하였다.
김정국은 전라감사로서 십여 조가 넘는 편민거폐(便民去弊)의 정책을 건의하여 국정에 반영하게 하였다. 또 중종으로부터, 전라도 관찰사가 전주 부윤의 탐오한 실상을 파헤쳤으니 가상한 일이라고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전라감사와 전주부윤은 같은 종2품 관직이다.
전라감사직에서 물러난 후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으며, 예조ㆍ병조ㆍ?형조 참판을 지냈다. 성리학과 역사, 의학 등 실용적 학문에도 밝았다. 김정국은 강개(慷慨)하여 감히 시사(時事)를 말하는 것이 형인 김안국보다 뒤지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김가 형제(金家兄弟)’라 일컬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김안국, 김정국 형제의 일화와 평
김안국은 기묘사화 때 조광조세력이 몰락한 후 기묘사림의 학문적 전통을 선조대 사림에게 연결시켜 주는 교량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는 조광조와 달리 성리학뿐 아니라 천문과 지리에도 밝았고, 의학, 이문(吏文), 한어(漢語) 등 실용적인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김안국은 문형(대제학)으로 있으면서 매양 중국에 보낼 표문을 지었는데 혼자 조용한 곳에서 구상하였으며, 좋은 구절이 생각나면 밤에라도 벌떡 일어나 손으로 창과 벽을 두들기며 뛸 듯이 기뻐하였다. 병중에 있으면서도 표문을 짓느라 몸이 더 상해 죽었다. 글이란 뜻만 통하면 그만인 것이며 생명을 상하는데 이르면 과한 일이라고 『지봉유설』에 평했다. 
김안국과 김안로(金安老)는 오랜 친분이 있었다. 김안국형제가 기묘사화 때 파직에 그친 것은 권신 김안로의 도움이 있었다고 한다. 김안로가 사사된 후 동생 김정국에게 말하기를 “우리 형제는 이미 그와 두텁게 사귀었으니 그의 악한 것을 말하지 말라”하고 매양 먹을 것을 그 가족에 보내주었다. 김안로가 죽자 문상간 사람은 김안국뿐이었다고 한다.
김정국에 대해 실록 그의 졸기에, “마음을 쓰는 것이 순정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이 공평하였으며 곤궁하여도 의리를 잃지 않고 현달하여도 도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또 김정국은 성품과 도량이 온순하고 일생동안 처사를 모두 순리대로 하였으니 군자다운 사람이다. 그 명망이 그의 형에게 미치지 못하는 듯하나, 실은 혹 더하기도 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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