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오수 ‘즉시 진정되어’ “임실군 둔남면 오수에서는 지나간 13일 장날에 예수교도, 천도교도와 보통학교 생도 등이 다수히 단체를 지어 시장으로 돌아다니며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며 시위운동을 개시하였는데 경찰관헌이 즉시 출동하여 극력 저지 해산케 하였더라.”1919년 3월 22일 매일신보에 보도된 내용이다. 3.1독립운동 103주년을 앞두고 오수 지역 독립운동사를 정리하며 우리의 나아갈 바를 생각해본다.
오수에서는 13일 장날 이전인 10일 오전 10시 오수보통학교 운동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설산 이광수 선생의 지도 아래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전교생의 절반 이상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힘차게 외쳤다. 보통학교 학생으로서는 전국에서 가장 먼저 독립운동의 횃불을 들어 올린 것이다. 충절의 고향 오수의 혼이 정의를 올바르게 세운 의거였다. 이광수 선생은 3월 3일 고종황제 국장에 참여하고 손병희 선생의 지시를 받아 만세운동을 펼쳤다.
오수보통학교 의거에 이어 12일에는 임실시장 한 복판에서, 그리고 15일, 23일에는 오수에서 대규모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됐다. 23일 의거는 고종황제 국장에 참석하고 내려온 이기송 지사 등 둔덕 이씨들 중심으로 결의됐다. 오수리 원동산공원에서 이기송 지사는 “우리 조선은 독립국이었는데 10여 년 전에 일본에 합병당하였으니 2000만 우리 국민 모두가 합심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오후 2시 드디어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리게 됐다. 당시 재판기록에 따르면 처음에는 20~30여명이 시장거리를 돌면서 독립만세를 외쳤고 대열은 점점 커져 수천 명까지 늘어났다. 항일독립운동 참여자들은 몇 번이고 거리를 돌면서 만세를 부르고 경찰과 주재소, 면사무소 등을 습격, 유리창과 문짝을 부수고 사무실 비품 등을 파괴했다.
이기송 지사 등 수십 명의 둔덕 이씨 일가는 일본인 경찰서장과 맞서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설파하다가 결국 붙잡혔다. 이에 대해 이만의와 이영의·이송의·이정의 지사 등은 체포된 이기송 지사를 석방하라고 일본 순사를 압박했고, 결국 이기송 지사는 다음날인 24일에 풀려났다. 이기송 지사는 풀려나자마자 다시 군중 앞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쳤고 그 열기는 더욱 높아갔다. 24일 저녁 남원 헌병대와 임실 경찰서의 무장대가 대거 출동, 서로 대치하다가 결국 발포해 사상자를 낸 뒤 해산됐다.
오수 일대에서 벌어진 항일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43명에 이른다. 특히 운동을 기획하고 일제에 항거하다 체포된 둔덕 이씨는 16명이다. 이기송 지사가 장기 7년의 징역형을 받았으며, 다른 일가들도 최소 4개월 이상의 징역형을 받았다. 둔덕 이씨 가문은 항일독립운동을 벌이며, 수감 생활을 하는 독립운동가를 보살피느라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일제의 혹독한 핍박 때문에 풍비박산 이산가족으로 살아야 했으며 고문 후유증 등으로 요절자가 많았다.
둔덕 이씨는 태조 이성계 5대손이자 효령대군 증손인 이담손 선생이 오수에 정착한 이래로 500년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명문가이다. 조선의 왕손이기에 ‘삼계강사’라는 학교를 지어 지역사회를 교화하고 풍속을 유지하는 데도 책임을 다해오는 것으로 평을 듣고 있다. 임진왜란 때 이대윤 선생은 의병을 일으켜 남원성을 지켜냈으며, 아들 이엽은 군량을 조달했다. 손자 형제는 병자호란 때 여산, 청주, 과천 전투에 참여해 공을 세웠다. 오늘날에도 이강국 전 헌법재판소장을 비롯해 훌륭한 자손들이 나라 발전의 기초를 다지고 있다.
오수 독립만세운동은 3.1독립운동 전국 10대 의거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둔덕 이씨의 풍속교화 등에 힘입어 오수가 충절의 고향으로 빛나게 됐다고 본다. 보통학교 학생들의 봉기와 둔덕 이씨 일가 등의 의거는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 아닐까? 다가오는 제20대 대통령선거에서 나라를 반듯하게 세울 지도자는 누구인가? 우리는 독립운동 의병정신으로 미래를 바꿀 지도자를 선택해야 한다. 
 /이춘구=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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