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희 (예원예술대학교 교수, 前 전주역사박물관장)

정숙지는 정도전의 현손으로 연산군 6년 1월 전라감사에 부임하여 9월에 체직되었다. 그의 고조부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모역자로 몰려 죽임을 당했으므로 봉화정씨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했을 것 같으나 사실은 다르다. 정도전의 아들 정진은 형조판서, 증손 정문형은 우의정, 현손 정숙지가 전라감사를 지냈다.

▶정도전의 후예들
정숙지의 고조부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창업한 정도전이다. 조선건국의 주역 세 사람을 꼽는다면 이성계, 정도전, 이방원을 들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정도전은 조선건국 후 문무 양권을 쥐고 강씨 소생 방석을 세자로 세우고 사병을 혁파하려다가, 이방원 세력에 의해 왕자들을 다 죽이려 한다는 모역죄를 뒤집어쓰고 살해되었다.
태조의 8자 방석이 세자가 된 것에 대해 정도전이 신덕왕후 강씨와 손잡고 벌인 일이라는 해석이 정설이다. 하지만, 이와 함께 유림의 추종을 받는 정몽주를 격살한 이방원을 세자로 세웠을 때 민심 이반에 대한 부담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태조는 역성혁명을 이루려 했고, 즉위 직후에는 국호도 바꾸지 않았다. 그런 태조로서 이방원은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조선건국의 역사를 해석함에 승자들이 기록한 역사에 끌려가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어찌 되었든 정도전은 이방원에 의해 역적이 되었고 조선말인 1865년(고종 2)에 가서야 신원 복권되었다. 정도전은 조선왕조 5백년 내내 역적이었다. 그러나 정도전의 아들과 손자는 달랐다. 봉화정씨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한 것이 아니었다.
정도전의 아들 정담은 자결했지만, 정진은 정도전이 주살되면서 전라도 수군에 충군되었다가 태종 7년에 나주목사로 복권되어 세종 때 충청도관찰사, 판한성부사를 지내고 정2품 형조판서에 올랐다. 정진의 아들 정속은 직산현감을 지냈고, 정속의 아들, 즉 정도전의 손자 정문형은 문과에 급제하고 연산군 때 우의정에 올랐다. 그 정문형의 아들이 전라감사를 지낸 정숙지이다. 

▶음관 출신 전라감사
일도를 통괄하는 종2품 도관찰사(감사)는 대부분이 문과 급제자들이다. 조선왕조 5백년간 부임한 전라감사의 91%가 문과 출신들이다. 조선은 고려와 달리 고위직에 오르려면 과거에 급제해 실력을 인정받아야 했다. 정숙지는 문과 출신이 아니면서 음관으로서 전라감사를 지낸 얼마 안 되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
정숙지가 벼슬에 나온 것은 아버지 정문형의 후광에 의한 것이다. 정숙지는 성종 5년(1474) 진사시에 합격하였는데 그때 전직(前職)이 봉훈랑이다. 실록에 보면 성종 2년에 이미 종7품 사옹원 직장을 지내고 있다. 생원진사시(사마시, 소과)는 문ㆍ무과와 달리 관직진출 시험도 아니지만, 정숙지는 진사가 되기 전에도 이미 벼슬에 나와 있었다.
정숙지는 성종 6년 육조의 정6품직 좌랑에 있었고, 성종 11년에는 어우동(어을우동)과 간통하였다고 하여 한차례 국문을 당하고 풀려났다. 어우동은 승문원 지사 박윤창의 딸로, 왕실 후손 태강수(泰江守) 이동(李仝)에게 시집갔다가 행실이 문란하다고 하여 버림받고, 여러 고위관료와 관계하여 풍속을 문란케 한 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성종 21년에는 아버지 정문형이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정숙지를 종3품 사재감(司宰監) 부정(副正)에서 정3품 사재감 정으로 승진시킨 것에 대해 대간들이 들고 일어나 편파적인 정실인사라고 비난하였다. 대간은 왕의 잘잘못을 간하고 관료들의 잘못을 탄핵하는 견제권자들이다. 정문형은 이 인사에 대해 해명하고 호조판서로 옮겼으며 사직을 청하기도 하였다.

▶전라감사 임용 논란
정숙지는 일찍부터 관직자로서 자질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그에 대해 문음으로 벼슬에 나와 연줄을 타고 치사하게 아부나 하는 능력도 없는 소인이라고 논박하였다.
정숙지가 전라감사에 제수된 것은 연산군 5년(1498) 11월이며, 전라도 임지에 부임한 것은 이듬해 1월이다. 호조참의로 있다가 전라감사에 제수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전라감사로 8개월 정도 재임하다가 9월에 체직되었다. 전라감사에 제수되면 대간의 서경을 받고 임금에게 하직숙배를 드리는 등 부임하기까지 여러 날이 소요되었고, 한양에서 전주에 내려오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한양에서 전주는 6일 거리이다.
그가 전라감사로 임용될 때도 감사로서의 자질여부를 놓고 통치권을 가진 대신들과 견제권자인 대간들의 논란이 크게 일었다. 그가 전라감사에 제수되고 부임하기까지 3개월여라는 긴 시간이 소요된 것은 부임절차만이 아니라 감사 임용을 놓고 논란이 야기되었기 때문이다.
대신 윤필상 등은 정숙지에 대해, “사람됨이 상명(詳明) 강개(慷慨)하니, 무엇인들 감당하지 못할 것이 있으리까.”라고 하였다. 또 성준 등은, “여러 조정을 섬기어 판결사ㆍ6조 참의까지 지냈는데, 소임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이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사헌부 장령 이의손 등은, "정숙지가 본디 재주와 인망이 없고 다만 각박한 것으로 겨우 작은 직무를 처리하였을 뿐입니다. 전라도는 지역이 넓고 백성이 주밀하므로 정숙지로 감사를 삼는다면 한쪽 지방을 망치는 일입니다. 상께서는 정승들의 의논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신의 생각으로는, 재상의 의논이라도 반드시 다 믿을 것이 아닙니다.”라고 반박하였다.
전라감사에 임용되기 전인 연산군 4년 무오사화 때 정숙지는 「조의제문」을 찬한 김종직을 부관참시하자고 부친 정문형과 함께 주창했었다. 정숙지는 사림(士林)들과는 다른 쪽에 서 있었다. 무오사화 전부터 그의 관직 임용시 대간들의 반론이 컸으며, 전라감사에 임용될 때도 논란이 크게 일어 사직을 청하기도 하였다.

▶전주객사 후원 진남루 중수
진남루는 전주객사(풍패지관) 후원에 있는 누정이다. 세종 때 전주사고를 설치한 후, 사고 건물이 없어서 『조선왕조실록』을 처음에는 승의사에 봉안했다가 진남루로 옮겨 봉안하였다. 그러다가 성종 때 경기전 진전 동측에 실록각을 건립하고 실록을 여기로 옮겨 봉안하였다.
『완산지』에 성종 4년(1473) 전주부윤으로 부임한 윤효손의 청으로 이경동이 찬한 「진남루기」가 실려 있는데, 이와 다른 「진남루기」가 성현의 『허백당집』에 실려 있다. 연산군 6년(1500) 전주부윤 이감(李堪)의 부탁으로 성현이 지은 기문이다. 이감이 전주객사를 중수하였는데, 이때 뜻을 같이한 전라감사가 정숙지이다.
이 기문에서, “객관의 뒤편으로 숲 사이에 누각이 얼핏얼핏 드러나 보이는데, 지은 지 오래된 데다 비바람에 침식되어 건물이 곧 무너져 내릴 듯이 기울어 있었다. 감사 정숙지공과 이공이 함께 이 누각에 올라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개연히 다시 지을 뜻을 품었다.”라고 하였다.
또 객사 후원의 풍치를, “뜰에 심어 놓은 늙은 측백나무는 구불구불하게 솟았고 큰 대나무는 뜰을 빙 둘러 죽죽 솟았는데”라고 묘사해 놓고 있다. 전주부에 대해서도, “남쪽 지방의 요충에 위치하여 수많은 가옥이 즐비하게 늘어섰고 사람과 물산이 모여들어 흥성거리는데, 남쪽으로 왕래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곳을 지나가야 한다.”라고 하였다.

정숙지는 전라감사 이임후에도 대간들의 논박에서 헤어나지 못하였다. 연산군 9년 형조참판에 임명되자 대간들이 그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반대하여 호조참판에 고쳐 임명되었고, 이에 대해서도 대간들이 반대하여 공조참판으로 고쳐 임명되었다. 이 공조참판 임명 기사가 실록에 나오는 정숙지에 관한 마지막 기사이다. 정숙지의 생몰년은 미상이다.

[사진설명]

1.봉화정씨 정숙지 가계(씨족원류, 17세기)
위에서 두 번째 단 우측에 정도전이 있고, 여섯 번째 단 우측에 정숙지가 수록되어 있다.

2.전라감사 정숙지(호남관찰선생안, 기령당)
우측 페이지 왼쪽 끝줄에 ‘관찰사 정숙지’라고 실려 있고, 이름 아래 ‘경신년(연산군 6) 1월 부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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