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도 전주에서 오랜 시간 명맥을 이어온 완산칠봉. 도심 속에 자리한 완산칠봉은 동학농민운동 때 격전이 벌어졌던 장소이기도 하다. 현재는 푸르른 녹음이 우거진 완산공원이 조성돼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정상으로 올라가려면 꼬불길을 걸어가야 하는데 길이 꺾기는 지점마다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중 하나가 ‘해학 이기선생 구국운동 추모비’이다. 이는 1983년 해학 이기 선생 구국운동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에서 건립한 것이다.
해학 이기(海鶴 李沂)는 실학자이자 근대적 개혁사상을 바탕으로 항일투쟁과 제도개혁에 힘쓴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848년(현종 14) 전라북도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에서 태어났는데 현재도 생가가 남아있다.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자는 백증(伯曾), 호는 해학과 질재(質齊) 등이 있다.

해학은 스승 없이 독학으로 천문, 지리, 음양 등 다양한 분야를 공부했다. 특히 유형원과 정약용의 저술을 읽고 실학에 눈을 뜨게 되면서 전제(田制) 연구에 힘쓰게 됐다. 이렇게 쌓은 학문적 기반은 그가 경세구국(經世救國)의 뜻을 세우는데 보탬이 된다.

당시 조정은 명성황후의 외척 세력들이 판을 치며 혼란스러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청·일·러 등 제국주의 세력마저 조선의 국권을 침탈하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해학은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백성들을 외면하는 민씨정권(閔氏政權)을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던 1894년(고종 31)에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했는데 그 길로 해학은 고부(지금의 정읍)에 있던 전봉준을 찾아간다. 혁명군을 이끌고 서울로 들어가 민씨 일당을 끌어내고 새로운 국헌을 제정(國憲)하자는 뜻을 전했다. 전봉준은 이를 수락했으나 남원에서 동학난을 이끌던 김개남의 반대로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다.

동학농민운동이 끝난 뒤에는 극도로 문란해진 전제를 개혁할 방안을 담은 「전제망언(田制妄言)」 쓴다. 그는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어윤중(魚允中)에게 글을 올린다.
1898년 전국의 토지 측량을 위해 양지아문(量地衙門)이 설치되고 해학은 양지위원(量地委員)에 임명돼 충남 아산의 토지를 실측했다. 김종회 학성강당 선생은 “해학 이기는 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기울어 가는 국세를 회복하기 위해 토지개혁이 꼭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며 “토지를 정확하게 측량하게 되면 지주의 횡포를 줄여 농민의 고충을 덜 수 있고 세수(稅收)는 더욱 늘릴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고 미국의 중재로 포츠머스 강화회의가 열리게 됐다. 해학은 나철(羅喆), 오기호(吳基鎬) 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조선의 입장을 호소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일본공사(日本公使) 임권조(林權助)의 방해로 수포로 돌아간다.

그는 미국이 아닌 일본 동경으로 행선지를 바꾼다. 일본 정계의 요인들을 찾아가 조선의 독립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고 일왕과 이등박문(伊藤博文)에게는 서면으로 조선에 대한 침략정책을 맹렬히 규탄한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됐고 그는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의 교관이 되어 후진 양성에 힘을 보탠다. 이듬해에는 장지연(張志淵), 박은식(朴殷植)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했다. 대한자강회에서는 국민교육 강화를 통해 국력을 키워 독립의 기초를 다지고자 했다.

1907년에는 을사오적신(乙巳五賊臣)을 처단하기 위해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했다. 같은 해 3월 25일, 권중현에게 가벼운 총상을 입혔고 계속해서 거사를 시도했지만 일부 동지와 함께 붙잡힌다. 이로 인해 7년 유배형에 처해져 전라남도 진도로 귀양을 가게 된다.

얼마 후 풀려난 그는 호남학회(湖南學會)를 조직하고 기관지 ≪호남학보≫를 발간한다. 호남학보에 계몽적인 글들을 발표하며 애국계몽운동에 박차를 가했으나 1909년, 국권 상실을 비관해 절식(絶食)을 하다 숨을 거두고 만다.
거듭된 좌절에도 굴하지 않고 국권수호를 위한 애국계몽 활동을 이어간 해학 이기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8년 정부에서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임다연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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