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요교마을의 한 초가집. 작업자들이 분주하게 지붕을 오르내린다. 초가에선 한 해 묵은 지붕의 볏짚을 모두 걷어내고 새 볏짚으로 엮은 이엉을 잇고 있다. 이석정선생생가에서 매년 치러지는 연례행사다.

석정 이정직(石亭 李定稷)은 1841년(헌종 7) 이곳에서 태어났다. 석정은 요교마을에 기거하면서 손님을 맞거나 후학들을 지도했다. 본관은 신평(新平)으로 자는 형오(馨五), 호는 석정(石亭), 석정산인(石亭山人), 연석(燕石) 등이 있다.
어릴 적부터 총명해 4세 때 천자문을 읽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12세부터는 강회민(姜會民)의 문하에서 역학을 공부했다. 이듬해에는 안정봉(安廷鳳)에게 성리학을 시작으로 예학(禮學)과 산학(算學) 등을 배웠다. 석정은 여러 학문을 두루 익히며 실학사상을 펼치는 기반으로 삼았다.

연보에 따르면 28세이던 1868년(고종 5) 연경(지금의 베이징)에서 1년간 체류하게 된다. 청나라에 머무는 동안 동서양의 사상서와 제자백가 등을 탐독한다.
그중에서도 서양철학을 깊게 탐구했는데 『연석산방미정문고(燕石山房未定文藁)』를 통해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책에서는 칸트를 강덕(康德), 베이컨을 배근(培根)이라고 표기하고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을 비교·분석한다. 석정은 근대 철학자로서 우리나라 최초로 칸트와 베이컨의 철학을 소개했다.

이 밖에도 중국 시문학과 성리학에 대한 해설과 비평을 했다. 그는 자신이 탐구한 내용을 『문고(文藁)』, 『시고(詩藁)』 등 25권의 책에 담았다. 이렇듯 청에서 다양한 학문과 예술을 접하며 사상적 기반을 넓혔다.

후에 김제로 돌아와 어음학(語音學), 천력학(天歷學), 술수학(術數學) 등을 공부하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특히 그는 옛사람들의 글씨를 연구하고 수련하듯 붓을 들었던 선비 서화가의 본보기였다. 고전에 따라 옛사람의 글씨를 익히고 전수할 목적으로 동기창과 구양순, 왕희지의 법첩(法帖)을 모사하고 김정희와 한석봉 글씨를 담은 재현첩(再現帖)을 만들었다.

석정의 고손(高孫)인 이명석 씨는 “석정 이정직은 옛것에 정답이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명필이라 이름난 서예가들의 글씨를 수없이 따라 썼다”며 “직접 만든 법첩을 교과서 삼아 제자들에게도 임모(臨摸)를 거듭할 것을 강조했다”고 전했다.

그는 글씨뿐만 아니라 시문과 그림에도 능한 ‘삼절(三絶)’이었다. 사군자를 중심으로 한 문인화를 그렸으며 전북 문인화의 출발점에 있는 인물로 볼 수 있다. 석정의 화풍이 제자들에게 전수되며 전북 화단에 문인화의 흐름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혜경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사는 “석정 이정직은 전북을 대표하는 서화가로 중국 및 조선 명필들에 대한 깊은 조예를 가지고 서예와 문인화의 본질을 탐구했다“며 ”고전의 연구와 해석을 바탕으로 고인의 필적에 근접하는 글씨를 쓰기 위해 노력했고 정갈하고 담박한 문인화를 남겼다“고 설명했다.

국립전주박물관에는 석정의 여러 작품이 소장·보관돼 있다. 서예작품으로는 오색 종이에 쓴 《초서십이폭병풍》이 있다. 활달하고 빠른 필치로 구사한 행초서(行草書)이다. 그림으로는 《묵죽도육폭병풍》과 《석정진묵》 화첩이 있다. 《석정진묵》에는 수작으로 꼽히는 괴석과 함께 대나무, 난초, 연꽃, 파초, 모란 등 다양한 그림이 수록돼 있다. 석정의 작품들은 오는 27일부터 국립전주박물관 특별전 ‘선비의 서예’를 통해 만날 수 있다.

한편, 석정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이후 전북을 이끌어가는 재목이 됐다. 서예와 사군자로 명성이 자자했던 조주승(趙周昇), 끝까지 유학자로서 선비정신을 지킨 송기면(宋基冕), 판소리연구자이자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정노식(鄭魯湜) 등 수많은 제자들이 각계각층에서 활동했다.

/임다연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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