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에 대한 평가는 박하다. 비록 892년부터 936년까지 45년 지속된 짧은 수명의 나라였지만 후백제의 국력이나 이데올로기적 기초, 문화적 역량, 백성들의 호응은 강국으로 불러 손색이 없다. 그럼에도 후세 역사가들은 견훤의 몇 가지 과한 성격과 행동을 들춰 그를 악인으로 몰아붙였다. 후백제 자체라 할 수 있는 견훤이 악인이 되고 보니 후백제 역사는 늘 뒷전에 밀려나 있었다.

실제 기록을 보면 아연할 따름이다. 다음은 경주 출신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쓴 견훤 인물평이다.

“견훤은 신라의 백성으로부터 일어나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 불측한 마음을 품고 나라의 위태한 틈을 타 도성과 성읍을 침략하고 임금과 신하를 죽이기를 마치 새를 죽이고 풀을 베듯 하였느니, 실로 천하의 으뜸가는 악인이며 인민들의 큰 원수였다”

거의 저주 수준이다. 이런 평가는 그 후로도 계속 이어져 견훤에 대한 이미지와 덩달아 후백제에 대한 인식도 형편없이 추락했다.

반면 최근 역사학계의 시각은 좀 다르다. 대다수 학자들은 견훤은 단순한 반란 수괴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건설을 목표로 민심을 수습하고 호족을 통합한 창업 군주라고 본다. 견훤의 후백제 건국은 궁예의 후고구려 건국의 모델이 됐고 나아가 왕건의 고구려 계승 정신과 북방중시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또 새 나라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불교 미륵신앙을 통한 이상사회 건설과 함께 백제계승을 내세웠다.

물론 신라왕을 주살하고 일부 호족들과 갈등 관계를 보이거나 가정불화 등 허물도 있다. 그렇지만 후백제는 후삼국 중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했고 동아시아 바다를 지배한 해상세력이었으며 일본이나 중국과의 대외관계도 활발히 전개했다. 그런 업적과 의의가 인간적 평가 때문에 깡그리 무시되는 것은 옳지 않다.

마침 전북과 경북, 충남의 7개 지자체가 참여하는 ‘후백제 문화권 지방정부 협의회’가 지난 달 출범했다. 협의회에 참여한 지자체는 견훤의 탄생과 성장, 건국, 죽음에 이르는 인생 여정과 관련된 곳들이다. 협의회는 앞으로 후백제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재조명해 정체성을 확립하고 나아가 문화관광 자원화할 계획이라고 한다.

때늦은 감이 있지만 다행한 일이다. 학계의 후백제 재평가와 맞물려 큰 성과를 낼 수 있는 계기다. 앞으로 광주 전남이나 경남 등 후백제와 관련된 다른 지역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숙원인 ‘역사문화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에 포함시키는 등 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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