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들이 모여 썰물 때만을 기다리고 있다. 육지와 떨어져 있는 작은 섬인 계화도로 가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물이 빠지자 질퍽한 갯벌을 추적추적 걸어간다. 보물이라도 숨겨뒀나 했는데 알고 보니 종착지는 계화재(繼華齋)였다. 이는 간재 전우가 1913년 계화도 양리(陽里)에 지은 것으로 계화재라는 편액을 걸고 강당으로 사용했다. 제자들이 물 밀려오듯 공부하러 오면서 주변에는 강학을 위해 들어선 건물만 13동에 달했다.

간재 전우(艮齋 田愚)는 1841년(헌종 7) 전주부 청석리(지금의 전주시 다가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담양전씨(潭陽 田氏)로 자는 자명(子明), 호는 간재(艮齋), 구산(臼山), 추담(秋潭)이다. 19세에 『퇴계집(退溪集)』을 읽으며 성리학이 위기지학(爲己之學)임을 깨달았고 평생 학문으로 삼고자 결심했다.
21세가 되던 1861년(철종 12) 전재 임헌회(全齋 任憲晦)에게 집지의 예를 올리고 문하에서 수학한다. 간재라는 호는 이때 받은 것이다. 스승이 외국 산물을 일절 쓰지 않는 것을 듣자마자 입고 있던 서양포를 벗어버렸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들은 전재가 의리를 중히 여겨 바로 실행하는 모습이 가상하다며 호를 내렸다.
간재는 율곡 이이(栗谷 李珥)와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로 이어지는 기호학파(畿湖學派)를 계승했다.

그는 화서학파, 노사학파, 한주학파의 비판서를 다수 집필했는데 타 학파 비판서를 많이 쓴 인물로 손꼽힌다. 노사학파 성리설은 「외필변(猥筆辨)」으로, 화서학파 성리설은 「화서아언의의(華西雅言疑義)」로 반박했다.

16세기 사단칠정논쟁, 18세기 호락논쟁에 이어 조선성리학사의 3대 논쟁으로 꼽히는 심설논쟁(心說論辨)의 중심에는 간재가 있었다. 심설논쟁은 간재로부터 시작하고 확산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05년(고종 42)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청참오적(請斬五賊)’이라는 상소를 올린다.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선 관료인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박제순을 참수해달라는 내용이었다. 1908년(순종 2) 일제 치하의 육지는 밟지 않을 것이란 말과 함께 혼탁한 세상을 떠나 부안 북왕등도로 들어간다.

이듬해에는 고군산도, 1910년에는 왕등도로 옮긴다. 그러다 1912년 계화도에 정착하게 됐다. 황재숙 문화관광해설사는 “제자들은 간재에게 학문을 배우기 위해 서해 고도인 왕등도까지 풍랑의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왔다”며 “제자들의 간청으로 점차 교류가 쉬운 섬으로 옮기게 됐다”고 전했다.
간재가 마지막으로 자리 잡은 계화도는 썰물 때가 되면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섬이었다. 제자들은 전라도를 비롯해 경상도, 강원도를 넘어 북간도와 제주도에서도 찾아왔으며 그 수가 약 3천 명에 달했다.

그러나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참여하지 않고 의병을 적극적으로 일으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파리장서는 1919년 유림단이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한 독립청원서이다. 전국 137명의 유림이 동참하고 서명하였는데 간재는 여기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 역시 참여할 의사를 밝혔다. 다만 요구 조건이 있었다. 대통령제가 아닌 이씨 종사(李氏 宗社)를 복벽(復辟)할 것, 공자교를 세워 기독교를 배제할 것, 단발 제도 엄금 등이었다. 하지만 이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유지웅 전북대 교수는 “간재는 일평생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왕정국가 복원을 염원했고 성리학 전통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 하지 않고자 했다”며 “파리장서는 그의 신념과 맞지 않았기에 결국 참여를 거부했다”고 밝혔다.
“500년 종사도 중요하지만 3000년의 도통(道統)을 잇는 것이 더 소중하니 무가치하게 목숨을 버리지 말고 학문을 일으켜 도(道)로써 나라를 찾아야 한다” 정통 왕권의 계승만이 국권 회복이라 믿었던 간재 전우의 이념이 담겨 있는 『秋潭別集(추담별집)』의 일부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의병 활동을 했던 유림들이 스러져가는 모습을 보며 자신이라도 도를 지키지 않으면 조선 성리학의 도통이 끊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간재는 국력을 되찾는 수단으로 학문을 택했다. 그는 위정척사(衛正斥邪) 정신을 세우며 조선유학사에서 변방 지역과도 같았던 호남을 기호학파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여전히 전라북도 곳곳은 그의 정신이 남아있다. 부안 계화도에는 그가 배향된 계양사(繼陽祠)와 강학 활동을 펼쳤던 계화재가 있고 지난 2008년에는 간재를 기리기 위해 청풍대비(淸風臺碑)가 세워졌다. 전주 덕진공원에서도 간재 전우 유허비를 만날 수 있다. 또 간재의 사상과 철학을 계승하기 위해 지난 2015년 전북대 부설로 간재학연구소가 설립됐다.

/임다연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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