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개봉된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저주받은 걸작’으로 꼽힌다. 작품성이 아주 뛰어났음에도 흥행에 실패한데다 공개 당시에는 평단의 냉랭한 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원작은 필립 K 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이다. 대략 인간과 복제인간 사이의 갈등을 그렸다. 이 작품의 주제 의식은 무겁다. 과연 인간이 만든 사회에서 유토피아는 무엇이며 디스토피아는 무엇이냐는 물음이 그것이다. 고도로 발달한 과학 테크놀로지 사회에서 인간의 도덕적 가치는 사라지고 황량한 디스토피아가 펼쳐진다.

여기서 등장하는 디스토피아 개념은 오늘날에도 많이 논의되는 이슈다. 유토피아란 좋은 장소 즉 낙원이다. 반대되는 말인 디스토피아는 나쁜 장소인데 지옥향 혹은 암흑향으로 번역된다. 존 스튜어트 밀이 1868년 영국 의회에서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 토지정책을 비판하면서 처음 썼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디스토피아는 지금 우리 눈 앞에 펼쳐진 현실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간 존재는 더욱더 초라해진다. 비인간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소설 ‘멋진 신세계’나 ‘1984년’, ‘우리들’ 등이 그리는 사회는 음울하고 삭막하기 그지없다. 유토피아를 지향 했지만 디스토피아가 현실이 된 것이다.

앞서 언급한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배경이 바로 디스토피아다. 핵전쟁 이후 혼돈과 무질서가 판치는 세상이다. 거기에 미래에 대한 희망과 낙관은 없다.

우리나라 드라마가 세계 시장을 휩쓰는 가운데 ‘지옥’이라는 제목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가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 공개 하루 만에 글로벌 순위 1위를 꿰차더니 이후에도 최상위권을 놓치지 않는 양상이다. 이 드라마는 지옥행이 고지된 이들이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목숨을 잃고 지옥으로 떨어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극도로 어두운 디스토피아의 세계다. 앞서 비슷한 경로로 세계적 히트작이 된 ‘오징어 게임’과 비슷한 분위기의 작품이다.

계속되는 K 드라마 열풍이 싫지는 않다. 하지만 한국적 디스토피아가 세계인들의 가슴에 각인되는 것 자체는 생각해볼 문제다. 얼마 전 우리 사회에는 ‘헬조선’이라는 말이 널리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다. 날로 심해가는 빈부격차에 젊은이를 옥죄는 취업난, 극단으로 치닫는 진영 간 대결, 가계부채 등등 현재 우리 사회를 지옥이나 다름없다는 인식이다. 해외 언론들도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K 드라마들을 분석하면서 그 배경에 ‘헬조선’이 그대로 반영돼 있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이러다가 행여 한국 이미지에 지옥이 덧붙여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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