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여암 선생은 고령인이니 경준은 휘요. 순민은 그의 자이다. ……이렇듯 거룩하신 어른을 말하면서 그의 호만으로는 부족하야 다시 그 휘와 그 자를 쓰게 되는 것을 보면 마치 이 세상에 대하야 첫 번으로 소개되는 것 같다. 세상이 다 여암 선생을 고로 알지 못할새 이렇게 써서 알어드리기를 구하는 것이 아닌가. 이 어쩌 개연치 아니한가.” 일제강점기 국학운동을 주도한 위당 정인보가 동아일보에 연재한 ‘여암 고택방문기’의 일부다.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 남산마을에 자리한 여암 고택. 푸른 잎이 우거진 가운데 여전히 기품이 가득하다. 본래 이곳에서는 조선 중기 문신 신말주(申末周)와 부인 설씨부인(薛氏夫人)이 살았다. 이후 신말주의 10세손인 신경준 등 후손이 태어나 자랐다. 1994년 전라북도 기념물 제86호로 지정된 ‘설씨부인 신경준선생유지’는 귀래정 신말주 후손 세거지로 불리기도 한다.

여암 신경준은 존재 위백규, 이재 황윤석과 함께 호남의 3대 실학자로 불렸다. 여암 신경준은 1712년(숙종 38) 순창군 남산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비상했던 그는 4세에 천자문을 뗐고 5세에는 「시경(詩經)」을 읽었다. 8세가 되던 해 상경하여 1년간 수학하다 강화로 가게 된다. 당시 강화는 하곡 정제두(鄭齊斗)가 낙향하여 양명학을 보급하던 곳으로 이곳에서 지낸 것이 계기가 되어 여암이 실학에 심취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1734년(영조 10) 23세가 된 여암은 「시칙(詩則)」을 저술한다. 온양을 여행하다 만난 소년에게 시 짓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시칙은 우리나라 최초의 시 이론서로 한시의 체제와 의미 등을 도표로 그려 설명했다는 점에서 특색을 갖는다.
여암은 43세가 되어서야 벼슬길에 오른다. 1754년(영조 30) 홍양호(洪良浩)가 주시(主試)한 증광시 향시(增廣試 鄕試)에서는 거제책(車制策)으로 같은 해 서울에서 치러진 회시(會試)에서 중광문과에 급제한다.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다 51세 때 서산 군수로 임명되었는데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든 뒤 팔아서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769년(영조 45)에는 왕명을 받아 「여지편람(輿地便覽)」을 감수한다. 여지편람에는 한반도의 산줄기를 가계도 형식으로 체계화한 「산경표(山徑表)」가 실려 있다. 산경표에서는 조선의 산맥을 하나의 대간(大幹), 하나의 정간(正幹), 그리고 13개의 정맥(正脈)으로 이뤄져 있다고 본다.

이듬해인 1770년(영조 46)에는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의 「여지고(與地考)」 27권의 편찬을 담당한다. 두 번이나 국책 지리서의 편찬을 맡은 그는 이미 18세기 최고의 지리학자였다. 순창문화원 박재순 사무국장은 “여암 신경준은 우리나라 고유의 방법으로 산맥과 수맥, 도로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라며 “그의 저서인 산수고와 도로고 등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여암이 1750년(영조 26) 지은 운해훈민정음은 지금까지 훈민정음도해, 훈민정음운해, 운해 등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졌다. 이상규 경북대 교수는 지난 2014년 어문론총을 통해 ‘여암 신경준의 『저정서(邸井書)』 분석’이라는 학술논문을 발표한다. 여기서 이상규 교수는 “운해훈민정음은 「운서(韻書)」와 「개합사장(開合四章)」이라는 두 필사본을 합본해 만든 저정서라는 사실을 확인했다”라며 “저정서는 모든 언어의 바른 소리를 적을 수 있는 문자인 훈민정음을 활용하여 한자의 음 분류를 체계화한 한자 운도(韻圖)로 저술된 책”이라고 밝혔다.

저정서는 훈민정음 반포 이후 최초로 저술된 훈민정음 연구서이다. 1938년 조선어학회에서 ‘훈민정음운해’라는 이름으로 단행본을 발간하면서 본격적으로 주목받았다.

여암의 학문에 대해 장교철 전 옥천향토문화사회연구소 소장은 “여암은 도교, 불교뿐만 아니라 지리학, 음운학, 군사학 등 다양한 학문을 익혔고 그것을 저술로써 남겼다”라며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는 성리학 외에 모든 학문을 이단시하는 경향이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성리학 외의 학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한다”라고 전했다.

/임다연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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