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희 예원예술대학교 교수, 前 전주역사박물관장

김지경은 고려 충절신 김주의 증손이다. 성종 3년 전라감사에 부임하였으며, 전주사고 실록각을 건립하였다. 전주사고는 세종 21년에 설치되었으나 이때까지 사고 건물이 없었다.

▶중국으로 망명한 충절신 김주의 증손
김지경(金之慶, 1419~1485))의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유후(裕後), 호는 송파(松坡)이며, 선산(지금의 구미) 출신이다. 증조부는 고려말 충절신 김주, 조부는 문경현감 김양보, 아버지는 덕산현감을 지낸 김지이다. 아들 김응기는 중종대 좌의정을 지냈다.
증조부 김주(金澍)는 호가 농암(籠巖)으로 고려말 중국 사신으로 갔다고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에서 새 왕조가 섰다는 소식을 듣고 고려 땅으로 들어오지 않고 중국에서 생을 마쳤다. 그는 ‘충신은 불사이군’이라는 편지를 부인에게 보내고, 관복을 남겨 부인이 죽은 후 합장하라고 하였다. 『승정원일기』 영조대에 그 후손들이 몇 대째 벼슬이 끊겼으니 등용하자는 기사가 있다.
구미시 도개면 궁기리 재궁마을에는 김주를 모시는 사당 충렬당(忠烈堂)이 있다. 우암 송시열의 글씨라고 한다. 근래 건립한 김기경과 김응기 부자의 신도비도 재궁마을에 있다. 김응기(金應箕)는 벼슬도 높았지만 천문ㆍ지리ㆍ수학에도 능통하였고 언행이 법도에 맞아 “동방의 부자(夫子)”로 불렸다. 이 마을은 선산김씨의 집성촌으로 조선초 많은 인물이 나와 ‘재궁(才宮)’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선산은 고려말 수절신 길재가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 등을 길러내는 등 영남사림의 산실이 되었던 곳이다.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길재가 양반 후손은 상재(上齋), 천한 집안 아이들은 하재로 삼아 경서를 가르쳤다고 하였다. 사육신 하위지와 생육신 이맹전도 선산 출신이다.
조선시대 선산도호부는 지금의 구미시이다. 1914년 선산군 구미면이 합천군 인동면과 합해져 구미시가 되었으며, 1995년에 구미시와 선산군이 통합되어 새로운 구미시가 되었다. 선산은 이제 구미시의 선산읍으로만 그 이름이 남아 있다.

▶대사간으로서 유자광 병조정랑 임명 반대
김지경은 세종 21년(1439) 문과 병과에 8등으로 급제하였다. 당시 나이가 21세로 매우 이른 나이에 문과에 급제한 것이다. 사간원 정언, 이조 좌랑과 정랑, 사헌부 장령을 지내고, 수양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 원년 12월 직제학으로서 좌익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세조 3년 세자시강원 우보덕에 있을 때 금성대군의 단종복위운동 조사차 예천에 파견되었다. 그는 이즈음 어버이가 늙었음을 이유로 향리 가까이에서 수령을 지낼 것을 청하여 성주목사에 제수되었다. 혼돈된 정국을 피하려는 차원이 작용했다는 해석도 있다.
이후 성균관 대사성과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고, 세조 13년에 대사간으로서 대사헌 양성지와 함께 서얼 출신 유자광의 병조 정랑 임명을 반대하였다. 김지경과 양성지의 논리는 서자가 인사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이 두 사람만의 주장이 아니었다. 병조는 무관의 인사를 행하는 곳으로 병조와 이조의 정랑은 5품의 하위직이지만 인사에 간여하는 중요 자리로 특별히 전랑(銓郞)이라고 하였다. 사림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유자광은 병조정랑에 임용되었다. 실록에 조선건국 후 서얼이 육조 낭관에 오른 첫 사례라고 기록되어 있다.
유자광은 남원 출신으로 이시애난 때 공을 세우고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유자광은 세조 14년에 온양별시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였다. 온양별시 총급제자는 4명이다. 전라감사를 지낸 유자환이 그의 형이다.

▶전라감사에 부임하여 전주사고 실록각 건립
김지경은 충청감사, 강원감사를 지내고 예종이 즉위하자 이조 참의가 되었으며, 예문관 부제학과 대사헌 등을 지내고 성종 3년 전라감사가 되었다. 『호남도선생안』에는 이름 아래 임진년(1472년, 성종 3)이라고만 되어 있는데, 실록에 보면 성종 3년 6월에 전라감사에 제수되어 7월에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드렸고, 이듬해 8월 호조참판에 임용되고 후임 전라감사로 이극균이 임용되었다. 1년여를 전라감사로 재임한 셈이다.
김지경은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전주사고 실록각을 건립하였다. 이때까지 조선전기 4대 사고 중에서 전주사고만 건물이 없었다. 세종은 실록과 국가 중요 서적의 영구 보존을 위해 기존의 춘추관과 충주사고 외에 전주와 성주에 사고를 더 설치하였다. 그러나 전주는 실록각 건물이 없어서 승의사에 실록을 봉안하다가 객사 뒤 진남루에 실록을 봉안하고 있었다. 승의사 자리는 한국전통문화의전당 일원으로 전당 입구에 실록봉안처를 알리는 조그만 빗돌을 근래에 세워 놓았다.
성종 3년에 『세조실록』과 『예종실록』 두 왕조의 실록이 완성되자 동지춘추관사 양성지가 실록 봉안사가 되어 전주에 내려왔다. 이때 전라감사 김지경이 양성지와 함께, 세조의 명령에도 지지부진하던 전주사고 건립을 논해 경기전 진전 동편에 사고를 건립하기로 정하였다. 양성지는 서울로 올라갔다.
김지경은 실록각 건립 계획을 담은 장계를 임금에게 올리고, 전주부윤 조근(趙瑾)을 책임자로 하고, 순창군수 김극련(金克鍊)을 감독관으로 하여, 인근 여러 포의 선군(船軍, 수군) 330명을 일꾼으로 동원하였다. 성종 3년 12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성종 4년(1473) 5월에 실록각을 완공하였다. 실록은 그해 8월부터 실록각에 봉안되기 시작하였다.

▶실질에 힘쓰고 선정을 베풀어
김지경은 전라감사 재임 후 호조참판, 평안도관찰사, 동지중추부사, 개성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성종 16년 병으로 사직을 청하자 한직인 호군에 제수되었다가 그해 67세로 졸하였다. 시호는 경질(景質)이다.
그의 졸기에 사신(史臣)이 평하기를, “타고난 성품이 강직하고, 강개하여 절조가 있었으며, 일에 임하여서는 실질에 힘쓰고 겉치레를 꾸미지 아니하여 사람들이 모두 공경하고 중히 여겼다. 그러나 집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담박한 데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가 전라감사로 재임하였을 때도 선정을 베푼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평안도절도사에 임용되어 하직 인사를 올릴 때 성종이 하교를 내리면서 말하기를, “경이 일찍이 전라감사로 재임했을 때에 사람들이 모두 칭찬했으니 지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