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란 불가에서 선정에 통달한 스님을 부르는 호칭이다. 큰 깨달음을 얻은 고승들에게 붙여지는 것이니 이에 걸 맞는 이들은 극소수다. 효봉 선사(1888~1966)는 현대 한국 불교에서 큰 산봉우리다. 선승으로서 도를 깨쳤고 구산과 법정스님, 시인 고은 등의 제자를 길러냈다. 또 한국 불교 통합종단인 조계종 초대 종정으로 추대돼 불교계의 거목으로서 많은 역할을 했다.

‘붓다가 된 엿장수’라는 책을 쓴 이정범 작가는 “효봉은 한국 불교의 새벽 봉우리였고 보조국사 지눌 스님의 환생과 같은, 이 시대 모든 불자의 영원한 스승이시다”고 기렸다.

효봉의 이런 공식적인 행보 뒤에는 수많은 일화들이 따랐다. 그를 부르는 별칭이 많다. ‘절구통 수좌’, ‘판사 중’, ‘엿장수 중’,‘너나 잘해라 스님’, ‘무라 스님’ 등이다. 그만큼 언행이 특별했다는 뜻이다.

아닌 게 아니라 효봉의 삶의 역정은 남달랐다. 우선 일제 강점기 판사를 지내다가 독립운동을 한 조선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 나서 고뇌에 빠졌다. 이후 판사 자리를 박차고 엿장수로 전국을 떠돌았다. 금강산 신계사에서 38세의 나이에 출가한 그는 좀처럼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엉덩이가 짓물러 방바닥에 눌어붙을 정도로 참선을 하며 용맹 정진했다. 그렇게 미동도 하지 않고 목숨을 건 수행자 모습이 마치 절구통 같았다. 그리고 44세에 드디어 득도한다. 그는 늘 ‘무(無)’자 화두를 들었는데 “무라, 무라…”는 혼잣말을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무라 스님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런 삶의 궤적에서 그렇게 많은 별칭이 생겨나 인구에 널리 회자된 것이다. 
효봉 스님의 법문집이 대중서로는 처음으로 발간됐다고 한다. 법어집에는 1948년 해인사 하안거 해제 법문부터 1960년 동화사 동안거 법문까지 약 40여 편의 상당법어가 수록됐다. 그가 입적한 후 반세기를 훌쩍 넘기고서야 대중들은 그의 육성을 책을 통해 듣게 된 것이다. 출판사 측은 “선지식이 귀한 시대에 이 책이 선(禪)의 울림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사실 지금과 같은 세태에서는 선정에 통달한 선사가 나기 힘들다. 조계종의 경우 최근 10년 새 출가자가 절반으로 줄었다고 한다. 스님들의 고령화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고된 수행과정을 밟아야 하는 선승의 숫자는 더 적다. 전국적으로 2천여 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말법시대 효봉과 같은 고승의 존재는 더욱 크게 느껴진다. 종교를 떠나 진정한 구도자의 말을 새겨들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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