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시 칠보면 시산리의 굽은 길을 따라가다 보면 한적한 남전마을이 보인다. 그곳에는 고현동각(古縣洞閣)이 자리 잡고 있다. 동각은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집이라는 뜻으로 대문 양쪽에는 삼강(三綱)과 오륜(五倫)이 각각 새겨져 있다. 불우헌 정극인이 주축이 된 태인 고현동 향약을 실시하고 기록하던 곳이기도 하다.

정극인은 진사 정곤(丁坤)의 아들이다. 1401년(태종 1) 경기도 광주의 두모포에서 태어났다. 자는 가택(可宅)이며 호는 불우헌(不憂軒), 다헌(茶軒), 다각(茶角)이다. 불우헌은 근심이 없는 집이라는 뜻으로 그가 정읍에 낙향하여 지은 집의 이름이다.
그는 1429년(세종 11) 생원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유학한다. 1436년(세종 18) 조선에 큰 기근이 들어 많은 백성이 굶어 죽게 된다. 이듬해 세종 임금이 한성의 서부 황화방에 흥천사를 중건하도록 특명을 내린다. 이에 그는 유생들을 이끌고 상소문을 올린다.

상소문의 주된 내용은 홍수와 가뭄이 심해 백성들이 궁핍한 생활을 하는 와중에 토목공사를 일으키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흥천사 건립은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하는 조선의 정신과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1인 시위까지 불사하며 흥천사 건립에 반대하자 세종의 진노를 샀고 결국 북도(北道)로 유배를 간다.

이후 아내 구고임씨의 고향인 태인(지금의 정읍)에 내려온다. 낙향한 뒤 향학당(鄕學堂)이라는 서당을 세워 향리와 어린 아이들을 교육하는데 힘을 쓴다. 청렴결백한 인품으로 후학 양성에 힘쓴 그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성종 임금은 1472년(성종 3) 성종조유서(成宗朝諭書)를 내렸다. 여기에는 “불러서 쓰고자 하나 그대가 나이 들어 정사를 맡기가 어려울 것임으로 특별히 삼품(三品)의 산관(散官)으로 올려준다”고 쓰여 있다. 이에 그는 크게 기뻐하며 불우헌가를 짓는다.

그는 최초의 가사 작품인 「상춘곡」과 단가(短歌) 「불우헌가」, 경기체가의 「불우헌곡」 등을 지어 국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안성렬 태산선비문화사료관 관장은 “불우헌가와 상춘곡은 한글을 사용해 지은 것으로 한국시가사에 큰 의미가 있는 작품”이라며 “정극인 선생의 독창적이고 뛰어난 문학성이 있었기에 정읍을 중심으로 가사문학의 전통이 이어지게 됐다”고 전했다.

또한 1475년(성종 6)에는 정극인을 중심으로 영광 정씨, 경주 정씨, 여산 송씨, 도강 김씨, 청도 김씨 등 5대 문중의 지역 유지가 모여 고현동 향약을 창립하였다. 향약은 고을 단위의 규약을 뜻하며 후학들에게 유교의 근본적인 원리와 사상을 교육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유교적 대동 공동체를 실현하고자 향약의 4대 덕목으로 덕업상권, 과실상규, 예속상교, 환난상휼을 제시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주도 향약으로 1556년(명종 11) 시행한 퇴계 이황의 예안향약과 1571년(선조 4) 제정된 율곡 이이의 서원향약보다 약 90년 앞서 만들어졌다. 총 29책에 기록돼 있으며 향약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아 지난 1993년 보물 제 1181호로 지정됐다. 동각이 위치한 남전마을 일대에서는 약 540년 동안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정극인은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도 시정의 폐단을 건의하는 상소문을 올리기도 한다. 8조목으로 구성된 상소문에서는 학교에서 훈도하는 사람으로 유교경전에 밝은 사람을 임명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이 밖에도 정사의 잘잘못에 대해 지적하며 개선을 촉구하기도 했다.

후에 그가 세운 여러 업적을 기리는 의미로 무성서원에 배향됐다. 무성서원은 최치원과 정극인 등을 향사하는 서원이다. 본래 통일신라 최치원을 기리던 태산사를 정극인이 세운 향학당 자리로 옮겨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남해경 전북대학교 건축학과 교수는 “무성서원은 다른 서원들과 비교해보았을 때 서원의 기본이 되는 유학공간의 틀을 잘 유지하고 있다”며 “유생들이 기숙하는 동재와 서재가 강당 앞 좌우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무성서원은 건축적 조건에 의해서 ‘강수재’가 측면에 위치하고 있다”고 무성서원의 건축학적 특징을 소개했다. 무성서원은 소수서원, 남계서원 등과 함께 지난 2019년 7월 1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무성서원이 있는 칠보면을 태산선비문화권이라 하는데 선비문화의 맥을 지키기 위해 태산선비마을이 들어섰다. 이곳에서 태산선비문화사료관과 상춘공원 둘레길 등을 만나볼 수 있었다. 지난 1988년 개관한 태산선비문화사료관은 태산선비문화권역의 주요한 문화자원을 소개 및 전시하는 곳이다.

사료관 외부에 조성된 상춘공원에서는 정극인의 동상과 상춘곡이 새겨진 시비 등을 볼 수 있다. 상춘공원 둘레길에는 길목마다 상춘곡의 구절이 하나씩 적혀 있다. 자연 내음을 맡으며 상춘곡을 읽다 보면 그가 추구한 유유자적한 삶을 느낄 수 있다.

한편 이곳에서는 매년 태산선비문화축제라는 이름으로 축제가 열린다. 축제에서는 고현동 향약 재현과 전통혼례식, 상춘곡 낭송대회 등 전통문화행사가 진행돼 남녀노소 모두가 호남지역 선비문화를 체험해볼 수 있다.

/임다연·장소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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