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면암(勉菴) 최익현 선생의 제자이자 고종의 스승인 연재(淵齋) 송병선의 제자들이 친친계(연재 제자모임), 현현계(면암 제자모임)를 구성한 후 건립된 전라북도기념물 제 120호 이산묘에는 한말 국권수호를 위해 노력한 항일의병의 위패와 그 기념흔적을 모아놓고 있다. /박상후기자·wdrgr@

진안군에는 조선 건국의 정신과 구한말 구국 항쟁의 뜻을 기리는 문화재가 자리잡고 있지만, 무관심 속에 잊혀져가고 있다. 

진안 마령면 등촌리 78번지. 마이산 도립공원 남쪽 입구 좌측에 덩그러니 자리한 ‘이산묘(전라북도 기념물 제120호)’는 일제에 국권을 빼앗겨 스스로 목숨을 끊은 우국지사 송병선(1836~1905년)선생과 의병장 최익현(1833~1906년) 선생의 애국충정을 이어가고자 건립한 사당이다.

이산묘는 단군, 태조 이성계, 세종, 고종을 비롯해 을사년 이후 순국한 의사·열사 및 조선의 명현 약 80위를 배향한 국내 최대 사당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이산 도립공원을 찾으면서 이곳은 무심코 지나쳐버린다. 

▲대한 이산묘 
1924년 송병선, 최익현 선생의 문인들이 선사의 유적을 추모하고, 망국의 혼을 씻고자 이산정사(현 이산묘)를 창건하고 1946년 회덕전과 영광사, 영모사를 차례로 건립했다. 회덕전은 국조인 단군왕검, 조선개국조 이태조, 민족문화의 중흥조인 세종대왕, 대한제국 고종황제 등 4위를 봉안한 곳이다. 영광사에는 구한말 을사늑약 이후 항일 독립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순국선열 34위가 봉안되어있다. 영모사는 조선개국 이래 충신명현 41위가 봉안됐다. 영모사의 편액은 해공 신익회 선생의 친필이며 영광사의 편액은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이다. 

▲호남의병창의 동맹단 집결지
이산묘 전면에는 호남의병 창의 동맹순국선열들의 호국정신을 기르기 위해 세운 위령비가 자리잡고 있다. 1907년 군대 해산을 계기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독립운동가 이석용은 의병들을 모집했다. 전라도 각지에서 모여든 동지들과 마이산에 모여 고천제를 거행했다. 

​▲비례물동과 대한광복기념비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는 뜻인 비례물동은 자신의 욕망을 극복하고 예절을 따르라는 의미다. 1916년 고종황제는 비례물동이라는 어필을 내린다. 이는 국권을 회복하고 민족자존을 되찾는 일이 곧 예의이니, 이천만 동포가 빼앗긴 조국을 되찾아야 한다는 의지를 표현한다. 광복을 기념해 1956년 세워진 대한광복기념비는 우남 이승만 대통령의 휘호로 전면에는 ‘大韓光復紀念碑’가 새겨져 있으며, 부통령 함태영이 지은 비문도 후면에 새겨져 있다. 

▲백범 김구 ‘대한건곤 청구일월’ 
마이동천 주필대 맞은편 은선골 암벽에는 ‘대한건곤 청구일월(大寒乾坤 靑邱日月)’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백범 김구 선생의 친필 각자다. 대한의 국운은 하늘과 땅처럼 무궁하고 민족의 장래는 해와 달처럼 밝다는 뜻을 담았다. 1948년 김구 선생은 순국선열을 추모하는 대한이산묘 성업봉찬회사업에 적극 찬동하고, 윤봉길의사 등 5위를 배향한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격려금과 함께 친필을 각자한 것으로 알려진다. 

‘빛을 되찾은 날’이란 뜻으로 잃었던 국권을 회복한 광복절(光復節)이 올해 76주년을 맞는다. 태조 이성계의 설화가 깃들어있고, 일제강점기 전북과 진안 일대의 항일운동 거점이자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이산묘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요구된다. 

진안역사박물관 엄기일 학예연구사는 “결국은 ‘이산묘’ 덕분에 광복 이후에도 ‘대한광복기념비’가 세워지고, 위패를 모실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고 말했다./박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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