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이 쇠락하며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특히 2020년 기점으로 수도권 인구가 비수도권 인구를 넘어섰다. 지금 지방은 저출생과 고령화 속에서 인구는 수도권으로 몰리며 소멸이라는 암울한 현실에 처해있다. 특히 전북은 2001년 200만명이었던 인구가 올해 3월 180만명선도 무너졌다. 특히 전북의 마을 소멸 위기는 더 심각하다. 지역인재 유출과 초고령화 현상으로 인해 '60대 청년'이라는 표현까지 나돌 정도이다. 이에 전라일보는 전북지역 14개 시군내 오래된 마을을 탐사취재하며 마을의 유래와 현재를 지면을 통해 살펴본다. /편집자

1.전주 풍남동과 한옥마을
-풍남동 지명 유래와 행정구역 범위
첫 번째로 거론할 전주 풍남동은 전주의 오랜 역사의 중심이다.
풍남동의 지명은그 이름대로 전주부성 성곽중 풍남문을 포함한다는데서 불리었다고 한다.
풍남동은 전주시의 중심에서 약간 동쪽으로 치우쳐 있으며 동쪽은 기린봉과 발제봉의 능선을 경계로 하여 우아2동과 접해있고 남쪽으로는 동고산성-천주교 순교자 묘지와 전주천을 경계로 동서학동, 서서학동, 완산동과 접했있다.
풍남동은 일제 강점기 시대 인근 중앙동과 더불어  행정 및 상업의 중심지였다. 당시에는 일본식 행정구역 명칭인 '통·정·정목'에 따라 '풍남정' '청수정' '화원정'등으로 불리었다. 그러던 중 1945년 해방이 되고 이듬해인 1946년 일본식 동 명칭을 변경, 1957년 전주시 조례 제108호를 시행하며 풍남동 행정구역이 도로망에 따라 재편성 됐다. 그리고 1973년에는 대통령령에 의해 풍남동은 경원동, 전동, 풍남동을 합쳐 행정동이 됐으며 1996년 경원동, 전동, 풍남동을 묶어 풍남동의 행정동에 이르렀다. 교동은 독자적 행정동으로 유지됐다. 이후 2005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풍남동과 교동이 합쳐지며 풍남동으로 개편돼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풍남동은 전주시의 대표적인 옛 도심으로 오랜 역사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당시 전주의 교육-문화, 각종 제례의식을 행하던 곳이기도 했다. 일제에 의해 전주부성이 헐리고 많은 유적들과 기록물들이 훼손됐지만 당시 조선인들이 집단마을을 이루고 고유 전통문화를 유지하면서 지역 상권 유지와 같은 조선인들의 주거지 보호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렸던 전주의 중심지이다.

-풍남동과 한옥마을의 역사
풍남동은 인근 중앙동-노송동과 더불어 전주의 중심이며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현재 행정구역상 풍남동에는 전주 최대의 관광지이자 역사의 숨결이 이어지고 있는 한옥마을이 있다. 한옥마을에는 조선왕조 태조 이성게를 비롯한 역대 조선 왕들의 어진을 모시고 제례를 지냈던 경기전이 위치하고 있으며 이성계가 왜적을 무찌르고 복귀하는 도중 머물렀던 오목대와 이목대가 위치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조선시대 공공기관이었던 전주향교도 풍남동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이렇듯 풍남동은 조선왕조와 전주의 정체성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가장 한국적인 도시 전주'의 전통적 중심공간이기도 하다.
행정동상 풍남동에 포함돼 있는 교동에는 한옥마을이 위치해 있다. 전주 한옥마을은 현재 가장 전통적인 한국의 마을로 알려져있으며 매년 수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도심형 관광지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전주한옥마을은 옛 도심 일대에 형성됐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자연경관과 전통과 현재가 조화된 공간으로 사랑받는 것이다.
전주한옥마을은 조선시대 말부터 지역의 유수한 학자들이 살며 학문을 익히고 후학을 양성하던 공간이며 우리 조상들의 전통적인 삶이 간직된 다양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소중한 공간이다.
한옥마을의 형성 유래를 살펴보면 당시 전주부성 외곽의 현 교동과 전동 일대는 전주천의 잦은 홍수로 인해 장기 거주는 사실상 힘들었다. 그런 와중에 대한제국 말~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전주부성이 헐리면서 현재 모습의 기틀이 갖춰줬다고 볼 수 있다. 현 경기전 일대인 동문 일대의 성벽이 철거되고 1914년부터 1931년까지 전동성당이 건립되는 과정에서 이 일대를 중심으로 지역 유생과 상인, 재력가들이 자연스럽에 현 한옥마을 일대에 모여살게 되었다.

-한옥마을의 현재
지금 전주한옥마을은 조선시대 지어졌던 건축물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이주해온 많은 상인들과 상시 거주민이 지었던 집들이 한데 어우러져 특이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전통적인 한옥집과 일본식 다다미방을 가진 적산가옥, 혹은 한옥과 적산가옥의 형태가 혼재돼 있는 변형된 한옥건물도 상당 수 자리하고 있다. 한옥마을 주변은 기린봉과 오목대, 영화촬영지로도 유명한 전라선 기차철로가 아우러지며 빼어난 풍경을 자랑하는데 이 아름다운 풍경이 이 곳의 발전을 발목죄는 족쇄가 되기도 했다.
1976년 정부는 한옥마을 일대를 '전통한옥 경관지구'로 묶어 버리는데 이로인해 한옥마을 일대의 주민들은 도시가스는 커녕 가옥 수리조차 개인적으로 하지 못하는 생활 속 큰 불편을 겪으며 도심 속 오지에 처하게 됐다.
그 후 민선 2~3기를 거치며 서서히 경관지구 해제를 통해 일부 경관과 가옥의 형태가 바뀌는 변화를 겪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주 외곽지역에 대단위 주택단지가 조성되자 많은 지역민들이 한옥마을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2005년부터 본격 시작된 공공기관들의 신시가지 이전은 주민 이탈을 부채질 했다.

이렇듯 여러 우여곡절끝에 형성돼 전국적 관광지로 관심을 끌고 있는 한옥마을은 현재 많은 문제점도 내포하고 있다.
우선 첫째 전통한옥의 정체성이다.
지금 전주한옥마을의 주거형태는 과연 전통한옥 양식인지 하는 의문점이 많다. 시대가 변하면서 기존의 기와가 아닌 기와 형태의 보급형 구조물에 의한 지붕개량과 주택개조에 의해 현형적인 한옥이 집중적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이로인해 전통 한옥의 정체성을 찾기 힘들다는 점이다.
기존의 전통건물을 허물어 새로운 한옥으로 신축하는 경우가 많으며 기존 건물에 대한 보호도 이뤄지지않고 있다.
둘째 한옥마을의 지나친 상업화다.
한옥마을 관광지 성장 이면에는 관광객 증가와 함께 몰리기 시작한 외부 투기자본들이 집중되며 전통문화도시와는 다른형태의 한옥마을로 변질된다. 문화-공연-멋보다는 길거리음식-스쿠터 임대-점집-오락실이 주를 이루며 예향관광도시 이미지가 실추 되고있는 실정이다. 지속가능한 관광지로서의 매력이 사라지고 있다는게 현실이다.또한 투기자금으로 인한 부동산 가격의 급상승은 이 지역을 기반으로 생활했던 예술가들의 창작공간 이전도 부추겼다.
현재 거주하는 주민들은 집값의 지속적인 상승으로 집은 팔리지 않고 임대료마저 천정부지 뛰어올라 입주하려는 사람이 없어 애를 먹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 한옥마을 곳곳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임대문의'넉자가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외부 거대자본이 유입돼 상권을 잠식하고 실질적으로 주거민에겐 이익이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 한옥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취재중 만난 이름을 밝히기 꺼려한 한옥마을에 50여년을 거주하고 있다는 주민의 이야기에서 한옥마을의 현 주소가 그대로 투영된다.
"예전 한옥마을은 비록 가진 것은 없어도 살만 했지. 누구나 시 한편은 읊을줄 알았을 정도로 풍류로 가득한 곳이었지"라며  "여름에는 산과 천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더위를 잊고 봄, 가을에는 꽃구경을 즐겼고  옆 집에서 기름 냄새가 솔솔 나면  "김 씨네 부침개 하나? 우리 집에 막걸리 있응게 가지고 오소" 이렇게 이웃까리 형제같은 정을 나누며 하루하루를 즐겼지만 이젠 그런 흥도 없어. 이웃들은 모두 떠나버리고 그 자리엔 상가들만 가득 채워져서 옛날 정취를 느낄 수가 없어. 정도 없어졌고…그게 제일 아쉬워."

이제 한옥마을은 좀 더 진실성있는 전주의 스토리텔링의 중심지로서 전주의 이야기와 주민들의 삶을 전달하고 다양한 풍류를 즐길 수 있는 공간, 그리고 방문객에게 가장 한국다운 전주, 그 중심에 있는 한옥마을의 매력을 되찾을 필요성이 요구되고 있다.
/최병호기자·hoya0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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