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근식
탁구장을 자주 찾는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주일에 한두 번은 탁구장에 간다. 여가를 즐길 수 있고, 직장동료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사실 내가 탁구장을 자주 찾는 것은 나만의 이유가 있다. 유일하게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남들은 술로 푼다지만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음주는 또 다른 스트레스다. 그런 탓인지 나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이 서툴다.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참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식은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혼자 끙끙 앓다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된다.

근무지를 옮기면서 스트레스가 많았다. 삼십년이나 직장생활을 했지만 이런 스트레스는 처음이다. 밤늦도록 일을 했지만, 만만찮은 일이라 스트레스가 쌓여만 갔다. 직장에서 지원하는 스트레스 해소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심리상담사에게 상담을 받았는데, 고위험군이라고 했다. 무조건 스트레스를 피하라며 염려해 주었다.

오늘도 탁구장에 간다. 감사장에 간 직원을 기다리다 탁구장으로 간다. 아침에 감사장에 들어갔는데 저녁 8시가 지나도 감감무소식이다. 감사장 앞에서 기다리다 지쳐 탁구장으로 가지만 발걸음은 천근만근이다. 오늘같이 스트레스가 쌓이는 날이면 나는 밤이 늦도록 탁구장에서 지낸다.

나이가 들면 몸이 약해지는 만큼 마음도 약해지는 모양이다. 오랜 직장생활로 직책이 오르고 경험도 늘어 스트레스를 적게 받을 만한데 예전보다 더 소심해진 것 같고, 스트레스를 더 받는 것 같다. 아내의 사소한 말 한마디, 직원들의 섭섭한 행동 하나에도 스트레스를 느낀다.

예전에는 스트레스를 잘 받지 않았다. 상사가 잔소리를 해도 돌아서면 잊어버렸고, 설사 스트레스를 받는다 해도 축구나 다른 운동으로 풀었다. 몇 년 전 그레이브스병을 진단받고는 아예 운동은 남의 일이 되었다.

탁구는 지난해 다시 시작했다. 예전에는 사회인 탁구시합에 나갈 정도로 제법 탁구를 쳤는데 흥미를 잃어버리고 난 뒤에는 탁구장에 간 적이 없었다. 라켓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도 모른다. 새로운 사무실에 우연히 탁구를 했는데 기분이 좋았다. 탁구 라켓을 쥐고 있는 순간만큼은 스트레스나 잡념이 없어진다는 것을 느끼면서 본격적으로 탁구에 빠졌다. 일주일에 10시간 이상을 탁구장에서 보낼 때는 내게 열정이 많다고 했지만 사실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탁구 경기를 하는 순간만큼은 공에만 집중할 수 있는 무아의 경지를 느끼면서 점점 빠졌다.

살아가면서 목욕탕에서 옷을 훌훌 벗어 버리듯 잡념이나 스트레스를 버리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잊어버리려 해도 돌아서면 다시 생각나게 하는 것이 잡념이나 스트레스가 아니던가. 그러니 잠시지만 그것을 벗어 버릴 수 있는 탁구장이야말로 나에게는 파라다이스인 셈이다.

얼마전부터 특별감사를 받고 있다. 정기감사도 부담이 되는데, 특별 감사를 받고 있으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다. 직원들의 사기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업무에 문제가 있으면 응당 책임을 져야 하지만, 부서에서는 원칙에 따라 업무처리를 했으니 문제가 될 리는 없지만, 직원들은 감사를 받는 것으로도 스트레스를 느낀다.

탁구의 백미는 게임이다. 모든 신경이 집중되는 순간이다. 눈을 집중하여 넘어오는 공의 위치와 회전을 확인한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라켓으로 공을 넘긴다. 다음은 넘어오는 공을 예상하고 다시 넘길 준비를 한다. 공이 멋있게 들어가는 순간에 가슴이 탁 트인다. 가끔 고수에게 배웠던 기술이 정확히 들어갈 때면 기분이 좋다. 게임은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다. 이기면 좋고 져도 신경 쓰지 않는다. 어쩌다 운 좋게 고수를 만나면 배우는 것이고, 하수를 만나면 도움을 줄 뿐이다.

탁구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는다. 옷을 갈아입으면서 자꾸 일들이 떠오른다. 감사는 끝났을까. 가벼웠던 어깨에 다시 스트레스가 짓누른다. 다시 일상의 시작이다.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확인한다. 감사를 받은 직원의 전화와 문자를 확인한다. 9시쯤 감사가 끝났다는 문자가 와 있다.

탁구장 밖은 어둠이다. 혼자 남았다. 비상등만 반짝거리는 건물 주위를 천천히 걷는다. 탁구장에서 무거운 옷을 벗어 버리듯 내가 가진 사소한 것을 하나씩 버리고 싶다. 멀리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린다. 여름이 깊어가고 있다. 객지의 외로운 밤은 또 이렇게 깊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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