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 희 (예원예술대학교 교수, 前 전주역사박물관장)

하연은 세종 3년(1401) 10월 예조참판으로 있다가 전임 전라감사 장윤화가 파직되면서 전라감사에 임용되었으며, 이듬해 윤12월에 병조참판이 되어 이임하였다. 그는 태종이 왕위를 세종에게 양위해 상왕과 왕, 두 명의 왕이 있을 때 국왕의 비서실장 지신사를 역임하였으며, 세종 31년 황희의 뒤를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 완주군의 고산 ‘삼기리’는 그가 전라감사로 있을 때 그곳의 수려한 경관을 보고 ‘삼기(三奇)’라고 명명한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고려말의 신흥명문 
하연(河演)은 고려말 우왕 2년(1376)에 태어나 조선 단종 1년(1453)에 78세로 졸하였다. 그의 본관은 진주이며,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ㆍ신희옹(新稀翁)이다. 그는 진주 니구산(尼丘山) 아래 여사촌(餘沙村)에서 태어났다. 현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여사촌 민속마을(예담마을)로 진양하씨 사직공파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증조부는 하즙(河楫)으로 고려말 문과에 급제하고 기황후 일족의 토지겸병을 처벌하였으며 찬성사에 올랐다. 할아버지는 문과에 급제하고 대사헌에 오른 하윤원(河允源)으로, “그른 줄 알면서 잘못 판결하면 천벌을 받을 것이다.[知非誤斷皇天降罰]”라는 여덟 글자를 벽에 걸어 놓고 공명정대한 일처리를 하였다고 전한다.
아버지는 고려말 우왕 9년(1383)에 전라도 안렴사를 지내고 조선건국후 공안부윤을 지낸 하자종(河自宗)이다. 그의 셋째 아들이 하연으로, 부자지간에 전라도 도백을 지낸 셈이다. 세종 4년 아버지 하자종이 정3품직 청주목사였을 때 아들 하연은 종2품직 전라감사였다. 같은 조정에서 아들이 아버지보다 벼슬이 높았던 보기 드문 경우이다.

▶세종 즉위직후 상왕과 왕 체제하에서 도승지 
하연은 고려말의 수절신 정몽주의 문인이다. 태조 5년 21세의 젊은 나이로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에 나왔다. 아버지를 제외하고 자신과 증조부, 조부 3대가 문과자이다.
이조 정랑과 대간직을 두루 역임하고 태종 17년 국왕의 비서 대언(승지)이 되었으며, 세종 즉위 직후 상왕과 왕, 두 명의 왕 체제하에서 지신사(도승지)에 임용되었다. 태종 17년, 태종이 하연을 동부승지로 임용할 때 하연의 손을 잡고 ‘경이 의연하게 일을 하므로 승지로 발탁했다.’고 하였다.
세종 즉위후 정국은 왕은 세종이지만, 상왕 태종이 군사권을 가지고 있는 살얼음판 같은 애매한 상황이다. 세종의 장인 심온이 처형된 것도 이런 정국에서이다. 하연은 이런 정국하에서 국왕의 비서실장직을 수행하였다. 동시에 두 명의 왕을 모셔야 하는 꼴이 되었다.
결국 도승지에서 4개월 만에 파직되었지만 태종과 세종의 총애 하에 곧바로 복직되어 감원감사를 지내고 예조참판에 올랐다. 상왕과 왕, 두 명의 왕 사이에서 하연이 자신의 역할을 무난히 마친 결과이다.

▶황희의 뒤를 이어 세종말 영의정 역임
하연은 유학자요 경세가로 여러 업적을 남겼다. 경상감사로 재임하던 세종 7년(1425) 『경상도지리지』와 『오례의』를 편찬하였다. 『경상도지리지』는 『삼국사기』 지리지 다음으로 오래된 지리지로 『세종실록지리지』의 모태가 되었다.
그는 황희 등과 함께 세종대 공법(전분 6등, 연분 9등)을 제정하는데 공헌하였다. 이 공법 제정은 세종 10년에 시작되어, 세종 26년에 최종 확정된 것으로 세종이 무려 17만명에게 물어 완성한 세법이다. 하연은 또 관리들의 행수법도 제정하였다. 행수법은 관직이 품계보다 낮으면 ‘행(行)’, 반대이면 ‘수(守)’자를 붙이는 관직체계이다.
하연은 대사헌, 대제학, 육조판서, 의정부 참찬ㆍ찬성 등을 두루 지내고 세종 27년 우의정에 올랐으며, 세종 29년 좌의정에 임용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세종 31년(1449) 74세의 나이로 황희의 뒤를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
황희는 18년간을 영상의 자리에 있었다. 그 바로 후임으로 하연이 나이 일흔이 훨씬 넘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비록 늦기는 하였지만, 18년간 영상이었던 황희의 후임으로 그가 선임되었다는 것은 그의 역량과 관련해 주목된다. 세종이 승하하기 1년 전의 일이다.

▶고산 ‘삼기정’ 이름의 명명자
고산면 소재지를 지나 삼기리 삼거리에서 대둔산으로 가는 길과 동상면 대아댐으로 들어가는 갈림길에서, 대둔산 가는 길로 들어서면 우편으로 나지막한 산언저리에 정자가 하나 있다. 삼기리 삼기정(三奇亭)이다. 비록 문화재 지정도 안 되었고, 1990년에 다시 중건한 것이지만 그 유래는 대단하다.
고산의 삼기리 지명이 이 삼기정에 왔다. 그리고 그 삼기정의 ‘삼기’라는 이름을 지은이가 하연이다. 하연이 전라감사로 있으면서 순행을 하던 길에 이곳 경관의 빼어남을 보고 삼기라고 명명하였다.
그가 지은 삼기정 기문이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산조에 실려 있다. “…안개와 초목들의 아름다운 경치가 모두 눈앞에 보이는데, 그 중에도 물ㆍ돌ㆍ소나무는 특히 기묘하게 좋은 경치였다. 이에 3기(奇)라고 이름을 정해 나무를 깎아 써 두었다.…”
고산현감 최득지(崔得之)가 여기에 정자를 짓고, 하연에게 기문을 받아 ‘삼기정’이라고 하였다. 1875년 최득지 후손들이 정자 터에 기우만이 지은 삼기정유허비를 건립하였다. 이렇게 명소임에도 사유지라고 하여 지금은 삼기정에 들어갈 수도 없고 올라가는 길도 제대로 없다. 완주군의 해법을 기대한다.  

하연은 문종 원년(1451)년 76세에 영의정에서 물러나 2년 후 단종 원년 78세에 졸하였다. 단종실록 그의 졸기에 그를 평하기를 “의정부에 있는지 20여년이다 … 처음에서 끝까지 근신(謹愼)하며 법을 잡고 굽히지 아니하였으니, 태평 시대의 문물을 지킨 정승이라고 이를 만하다 …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함을 지키기를 하연과 같이 한 이도 적었다 … 그러나 그 논의가 관후(寬厚)함을 숭상하지 아니하여 대신의 체면을 조금 잃었다.”라고 하였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함이 ‘문’이고, 자혜하고 어버이를 사랑함이 ‘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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