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젊은이들은 당시 이야기를 들으면 ‘말도 안 되는 것 같다’고 할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기억해줬으면 해요”.

6월 6일, 호국 보훈의 달 현충일을 맞아 6·25 참전용사 이순철 옹(89)을 만나봤다.

1950년 7월, 여름방학을 보내던 군산 상업중학교(군산상고)학생, 19살의 이순철 옹은 갑작스레 인근 국민학교로 집합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운동장에는 다른 학생들이 이미 여럿 앉아있었고, 담벼락을 따라 학부형들의 걱정스런 눈짓이 오갔다.

학부모들이 학생들에게 접근할 수 없도록 헌병들이 빙 둘러싼 가운데 경직된 분위기가 흘렀다. 강당에서 신체검사를 받은 직후, 열차에 올라탄 이 옹과 학우들은 이리(현 익산)로 향했다. 학생들을 태운 증기기관차는 남원과 순천 등을 거쳐 대구에 마지막으로 정차했다. 연필을 잡던 손에 M1소총이 들려진 순간이었다.

이 옹은 당시를 두고 “그 때는 방학이 끝나면 전쟁도 끝날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1주일쯤 훈련을 받은 이 옹은 8사단 16연대 소속으로 처음 참전했다. 수십여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그 위치도, 상황도 뚜렷이 기억에 새겨진 채였다. ‘경북 의성 북방 20리’.

처음 전투와 더불어 큰 부상을 입었던 전투 등은 이 옹의 기억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당시 아직 사격에 익숙지 않던 학도병들은 전문 훈련을 받은 북한군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밤이 되면 총검을 장착하고 몰래 올라온 북한군들이 심장을 찌르는 바람에 비명횡사한 전우들도 많았다고 이 옹은 설명했다.

이순철 옹은 “영천까지 인민군이 점령한 뒤 좀처럼 진격하지 못하던 중 인천상륙작전 이후 상황이 바뀌었다”며 “목포까지 점령했는데 포탄이 연신 떨어지면서 많은 이들이 다쳤다”고 했다.

빗발치는 포탄 속에서 치열했던 전투는 이 옹의 몸에 상흔으로 남았다. 아흔이 가까워 온 지금까지 당시 박힌 두 개의 파편이 몸 안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텐트를 겸용하던 우비와 담요 따위가 담긴 군장이 그를 구했다. 당시 포탄 탓에 몇몇 전우들은 크게 부상을 입거나, 정통으로 그것을 맞고 소리조차 지르지 못한 채 산화하기도 했다고 그는 회상했다.

부상을 입은 이 옹은 중학교를 개조해 만들어진 군 병원에서 2달여 간 치료를 받고 타 사단에 재편성 되어 다시 전선에 섰다. 강원도 철원 등지에서 복무하던 시절, 그가 있던 삼각고지에서는 매일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휴전을 앞두고 1m라도 더 점령하려는 목적에서였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고, 그는 3년여 뒤인 56년 7월 28일 육군 만기제대를 했다. 치열한 전투에서 몸 바쳐 싸운 공적을 인정받아 수여받은 화랑무공훈장 2개도 함께였다.

19살의 나이로 집을 떠났던 학생이 7년여 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서야 돌아온 셈이다.

떠난 아들을 기다리며 아버지는 집 벽에 태극기를 걸어놓고 매일같이 무사히 돌아오게만 해달라고 기도를 하셨다고 했다.

이 옹은 “인민군이 군산까지 오면서, 큰 형님이 ‘인민군이 와 문을 열어볼 지도 모르니 태극기를 떼어놓으시라’고 권했지만 아버지는 그저 태극기를 뒤집어 걸어두었을 따름이라고 했다”며 “위험한 상황에서조차 그렇게까지 간절히 기도하셨던 아버지 마음 탓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토로했다.

참전용사 세대는 근현대 한국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이 옹 역시 6·25 전쟁 뿐 아니라 일제 강점기까지 몸소 겪었다.

그는 “국민학교에 입학할 때만 해도 조선어 수업이 없어지고 우리 말을 쓰면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독립이 되고 군산상중(군산 상고)에 입학을 했는데, 이제 ‘공부 할 만 해지나’ 싶었더니 전쟁이 터졌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면서 “그렇게 힘든 시기를 겪고 몸 바쳐 싸웠지만 요즈음에는 우리가 청년들에게 밀려 좀처럼 지원받지 못하는 것 같아 섭섭함을 느낀다”며 “살아있는 참전용사들을 평소에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예우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김수현 기자·ryud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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