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눈의 친구

오피니언l승인2021.05.26l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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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현(전기안전공사)

그를 만난 것은 11년 전 어느 여름날이었다. 전역 후 마음을 정리할 겸 해서 떠난 호주에서 그를 만났다. 부리부리한 푸른 눈에 목을 꺾어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키가 훤칠했던 그는 내가 일했던 리조트의 스텝이었던 호주인 존이다.

나이가 나보다 15살 많았던 존은 한국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때는 방탄소년단처럼 세계에 이름을 날린 가수도 없었는데 어떤 점이 그를 매료시켰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나보다 먼저 근무했던 한국인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한류에 관심이 많아서였을까? 존과 친구가 되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아름다운 주홍빛 석양을 머금은 파도 소리가 인상 깊었던 리조트에서 하늘의 별을 보며 맥주 한 잔에 하루의 피로를 풀어나갔다. 그렇게 두 사내의 우정은 깊어져 갈 무렵 내가 리조트 일을 그만두면서 헤어졌다.

존을 다시 만나게 된 건 3개월 후의 일이었다. 시드니에서 영어 강사 자격증 과정을 마치고, 남은 기간 동안 어디에서 지낼지 고민하던 차에 SNS를 통해 그에게 연락이 왔다.

호주는 인종차별이 존재하는 국가다. 해외에 나오기 전에는 그 단어가 그토록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일 줄 몰랐다. 시드니 길거리에서 술 취한 무리들이 아시아인을 향한 경멸의 눈빛과 독설들은 아직도 내 가슴 깊숙이 박혀있을 정도이다.

목적지를 잃어버린 집시처럼 홀로 정처 없이 거리를 걷던 내게 그는 손을 내밀어 주었다. 자신의 집에서 머물 것을 선뜻 제안했다. 아무리 예전에 직장에서 친하게 지냈던 사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집에서 머무르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내가 만약 그 상황이었더라면 그런 행동을 쉽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그의 집에서 3개월을 지냈다. 맥주를 함께 만들어 한 달 동안 숙성시켰지만 맛이 없어 실망하기도 했고, 한국 음식을 자신 있게 만들 수 있다며 간이 전혀 되지 않고 맵기만 했던 양배추김치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일상적이지만 그와 소중한 추억들을 차곡차곡 모으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귀국할 날을 얼마 남겨 두지 않았다.

나는 존의 집에서 오전에는 일하고 오후에는 시내에 있는 어학원을 다녔다. 그곳에서 12살 연상의 여성과 수업을 같이 듣게 되었다. 한국에서 불행했던 결혼생활을 끝내고 아이들과 같이 호주에서 새 삶을 시작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묻지 않고 스스럼없이 대해주는 나와 친해지게 되었다.

가끔 과거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녀의 눈가가 적셔졌다. 흐려지는 망막 너머 가시가 박힌 아픈 눈동자를 보면 그녀의 인생이 험난했음을 알 수 있었다. 자식을 데리고 아무 연고지도 없는 이 머나먼 낯선 땅에 발을 디디는데도 큰 결심이 필요했을 것이다.

두 친구를 이어주자는 결심이 섰다. 서로의 부족함을 어루만져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월이 할퀴고 간 그녀의 상처를 그가 달래줄 것이고, 그의 마음속 공허함을 그녀가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둘의 첫 만남은 불꽃처럼 강렬하진 않았다. 하지만 피부에 느껴지는 미묘한 공기의 떨림은 그들을 잇고 있었다.

고국에 돌아오고 얼마 안 되어 그들의 웨딩사진이 SNS에 올라왔다. 행복해 보였다. 어두웠던 그들에게 포근한 햇살이 비치는 것 같았다. 앞으로도 그들은 가정이란 정원을 행복이란 햇살로 가꾸어 나갈 것이다.

문득 그가 만들었던 맵기만 했던 양배추김치가 생각난다. 결혼이라는 아름다운 양념이 더해진 그의 김치는 지금 어떤 맛을 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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