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 겸한 명필가의 가없는 ‘불심’

<이동희의 전라감사 열전>1.화암사를 중창한, 성삼문의 조부 성달생 전라일보l승인2021.05.20l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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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감영 동편이 지난해 복원됐다. 완전한 복원을 위해 첫발을 내딛었고 앞으로 서편부지와 남편부지 복원이라는 과제가 남았다. 부지의 복원과 함께 전라감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지방정부의 수장이었던 역대 전라감사의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화암사를 중창한, 성삼문의 조부 성달생

성달생은 사육신 성삼문의 조부로 무과 출신이다. 태종 17년(1417) 12월에 전라도 도관찰출척사 겸 병마절제사로 부임하여 이듬해 7월에 중군총제가 되어 이임하였다. 전라감사 역임후 세종대에 대시주가 되어 화암사를 중창하였으며. 당대의 명필로 여러 불경을 필사하였다. 법화경 중에 많은 수가 그의 글씨로 판각한 것이다.

▶사육신 성삼문의 조부
성달생(成達生, 1376~1444)의 본관은 창녕, 자는 효백(孝伯)이다. 아버지는 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되어 전라감사와 대사헌을 역임한 성석용(成石瑢)으로 부자지간에 전라감사를 지냈으며 둘 다 글씨를 잘 썼다. 성달생의 큰아들은 성승이고, 성승의 아들이 세조의 왕위찬탈을 죽음으로 맞선 사육신 성삼문이다.

조선초에 여러 명의 전라감사가 창녕성씨 집안에서 나왔다. 성석용, 성달생 부자와 함께, 성석용의 아우 예조판서 성석인의 아들 성억, 손자 성봉조, 증손 성임과 성준, 현손 성세창과 성세정, 성준의 족친 성세순 등 9명이 전라감사를 지냈다. 전라감사 역임자 중 창녕성씨가 9명인데 모두 조선초기의 사람들이다. 성달생의 사위 한혜도 전라감사를 지냈다. 한혜는 27세에 전라감사가 되었는데 최연소 전라감사로 보인다. 그의 아버지는 개국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한상경이다.

창녕성씨는 조선초 벌족한 가문이다. 성달생의 백부 성석린(成石璘)은 개국원종공신으로 영의정에 올랐으며, 숙부 성석인(成石因)은 예조판서를 지냈다. 성석인 아들 성억의 딸이 태종의 넷째 아들인 성녕대군에게 출가하여 명문가로서 지위를 굳혔다. 성석인의 손자 성봉조는 세조비 정희왕후 동생과 혼인해 우의정을 지냈으며, 증손자 성준은 영의정에 올랐고, 성현은 대제학을 지냈다. 성현은 「용재총화」의 찬자로 전라감사를 지낸 성임의 형이다. 성현의 손자 성세창은 좌의정에 올랐다. 성석인의 6대손은 문묘에 배향된 성혼이다.

▶생원시에 합격하고, 무과에 장원급제한 무관
전라감사는 대부분 문과 출신들이다. 조선왕조 5백 년간 467명이 전라감사로 부임하였는데, 이 중에 문과자가 424명으로 91%에 이른다. 감사(관찰사)는 전라감사만이 아니라 대부분 문과자들이 가는 자리이다. 전라감사 중 무과자로 확인되는 사람은 성달생 1인이다. 물론 미확인자 중에 무과자가 더러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과자로 전라감사에 임용된 것은 특이한 경우이다. 

그런데 또 특이한 것은 그가 문과 소과인 생원시 출신이라는 것이다. 고려말 공양왕 2년(1390)에 성달생은 15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조선건국 후 처음으로 시행한 태종 2년 무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소과에는 생원시에 합격하고 대과에는 무과에 급제한 셈이다. 이런 경력으로 보아 문무를 겸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명필로 유명하다. 그가 여러 불경을 필사하고, 특히 『묘법연화경』의 경우 그가 필사한 것을 판각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그의 불심과 함께 글씨를 잘 썼던 것에 기인한다. 그 집안에는 이들 부자만이 아니라 글씨를 잘 썼던 인물들이 여럿이다. 성석린은 태조 건원릉신도비를 썼고, 성임도 명필로 이름이 높다.

성달생은 북방에서 이름을 날린 명장이다. 태종이 잠저에 있을 적에 총애를 받았으며, 태종 2년 무과에 장원하여 대호군에 특진되고 흥덕진병마사가 되었다. 태종 10년에는 무과 중시에 2등으로 급제하여 예빈시사에 올랐으며, 태종 17년 전라도 관찰사 겸 병마절제사에 임명되었고, 세종대 함길도절제사, 우군도총제, 공조판서, 판중추원사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양혜(襄惠)이다.

▶세종대 화암사 중창의 대시주
완주군 경천면 불명산 화암사는 산속 깊이 좁은 터에 자리한 작은 절집으로, 그 절의 소박함과 함께 계곡 따라 들어가는 길이 포근하고 인상적인 곳이다. ‘꽃이 비 처럼 나린다’는 이름을 가진 우화루(보물 662호)도 그렇다 극락전은 국내 유일의 백제식 건축양식 하앙식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보물이 되고, 이어 국보(316호)로 승격되었다. 극락전 편액도 한자씩 따로 만들어 붙여져 있다.

극락전 옆에 한칸짜리 특이한 건물이 있다. 성달생을 모시는 사당 철영재(?英齋)이다. 사찰 경내에 사당이 있는 경우는 거의 못 보았을 것이다. 그것도 법당 옆에 사당이 자리한 경우는 없을 것 같다. 철영재는 성달생이 대시주로 세종대 화암사를 중창하였음을 기리는 사당이다. 철영재 편액은 이조참판을 지내고 19세기 서화와 시단에 이름이 높은 자하(紫霞) 신위(申緯)가 썼다.

화암사중창비(도유형문화재 94호)에 의하면, 성달생이 중국으로 간택되어 간 딸을 위해 원찰을 건립하고자 물색하다가 화암사를 적지로 보고 중창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딸은 세종 9년, 17세 때 명나라 처녀 간택에 징발되어 갔다.

▶명필로 불경 필사, 안심사 화암사 판각
화암사는 절집 규모는 작지만 작은 사찰이 아니다. 많은 불경과 서적들이 안심사와 함께 화암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두 사찰은 멀지 않은 가까운 거리에 있다. 운주면 안심사는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지만, 건물이 30채나 되던 큰 사찰로 만해 한용운이 일제의 한글 금지에 반발해 한글로 불경을 찍었던 곳이다.

안심사와 화암사에서 판각된 불경의 글씨를 쓴 주역이 성달생이다. 그가 아우 성개와 함께 세종 5년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필사해 안심사에서 판각한 『묘법연화경』은 법화경 판본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보물 961호, 971호, 1306호 법화경 등이 모두 성달생이 필사한 것을 판각한 것이다.

화암사에서도 1433년 성달생의 글씨로 법화경을 판각해 출간하였다. 성달생은 세차례 『묘법연화경』, 즉 법화경의 정서본을 써서, 1405년, 1422년, 1433년 각각 안심사, 대자암, 화암사에서 간행되었다. 화암사판은 이후 지속적으로 간행되어 24종이나 나왔다고 한다. 화암사에는 법화경 외에 여러 불경이 간행되었으며, 불경 외에 『증수무원록 언해』 등 많은 책들이 출간된 곳이다. 화암사 목판의 일부가 전북대박물관에 위탁되어 관리되고 있다.

성달생은 불심이 깊었다. 명나라에 바쳐진 딸은 그의 불심을 더 깊게 하였는지 모른다. 화암사는 그의 애절함을 담은 사찰이기도 하다.
/이동희 (예원예술대학교 교수, 前 전주역사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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