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밭정이를 지나다가 길가에 벌려놓은 엿이 하도 먹음직하기에 사 먹으며 보니, 엽전꾸러미가 의젓이 돈 무더기에 놓여있다. 아직 전주도 그런가하여, 당연할 일이건만 퍽 의외로 생각된다. 다섯 닢이 일 전이라니 쇳 값에 지나지 않을까 하였다. 흰 엿 무슨 엿 할 것 없이 보기에나 먹기에나 퍽 만만한 것이 전라도 엿이요, 들깨쌈 콩쌈 따위 종류도 서울보다 많다. 콩나물이 연하고, 엿이 말쑥한 것은 아무래도 전라도의 특장이라 아니할 수 없다...."
"... 장날이라 하여 짐을 진 사람, 머리에 이고 오는 사람, 수레를 끄는 사람, 우마를 몰고 오는 사람이 꾸역꾸역 모여드는 남문 거리를 지나..." 이 날 최남선의 눈에 비친 남부시장 장날 풍경은 장작, 종이, 대나무, 돌절구, 엿, 들깨쌈, 콩나물 등이었다."
최남선이 1925년 경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주변의 남한 각지를 순례하고 쓴 '남도 기행문집'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때 전주 주변 각지에서 50에서 수백명 단위의 장사꾼들이 장작과 종이, 대나무, 절구, 엿 등을 지게에 지고 오는 장면이 흔했다고 한다.

◆서울과 같은 대도회 전주

1918년 촬영된 동영상을 보면 서문밖 시장, 남문밖 시장 2곳 외에 매곡교는 보이지 않는다. 남부시장 전주천 건너에는 나무장사가, 남문밖 시장에서 풍남문으로 건너 오는 다리 아래에는 싸전이 형성됐다.

현재의 전주 남부시장은 행정을 비롯, 농상공의 중심지였던 전라도감영 인근에 설치된 시장으로, 그 역할과 기능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택리지擇里志'에서는 전주를 서울과 같은 대도회라고 기술하고 있다. 전주의 시장은 인근의 김제(쌀), 임실(콩), 금산(인삼), 금구, 진안(산나물) 등지와 밀접한 상업망을 이루고 있었다.

'만기요람'에는 조선 후기 전주의 읍내장이 전국 15대 시장으로 꼽혔을 뿐만 아니라, 대구·평양 혹은 대구·공주와 함께 조선의 3대 시장으로 불리고 있었다. 거래물품은 평야지대에 위치하였으므로 당연히 미곡이 으뜸이었고, 특산품인 생강(봉동)·종이·부채·칠·자기·죽세품·감·석류·항아리 등과 그밖에 토목·모시·연초·해산물 등이었다.

1894년 동학혁명 전에는 전주성의 사대문 밖에는 모두 장이 섰다.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전주성 남문인 풍남문(豊南門) 옆 서쪽의 '남문밖장' 이었다. 조선 후기 전라북도의 인구 분포를 보면 전주가 7만2,505명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이 남원 4만3,411명, 부안 3만8,448명, 태인 3만1,205명, 고부 2만8,631명, 임실 2만7,516명 순이었다. 전주가 위치도 중심이고 인구도 많아 자연스럽게 유통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이때 서문교회 인근에는 서문밖장이 형성됐는데, 한지 판매도 많아 나중에 다가동 지역에서 출판을 담당했다. 동문 오른쪽에는 동문시장이, 오거리 공터 부근에는 북문시장이 있었다.

◆조선의 3대 시장

일제강점기 초기 지도에 전주교로 표시된 '싸전다리' 좌우로는 쌀가게가 들어서 있었다. 설대전다리(매곡교) 아래에서는 2·7일장인 우시장이 섰으므로, 그 곳을 속칭 쇠전강변이라고 한다. 우시장이 열리면 수많은 소가 나왔고, 술판과 투전판이 벌어졌다. 이에 천변을 따라 국수공장과 양조장들도 늘어섰다. 이 우시장은 1914년 전주천 정화라는 미명 아래 현재 전주교대부속초등학교 남쪽 자리로 옮긴 뒤 쇠퇴했다. 설대전다리 건너 완산칠봉으로 가는 길에서 서서학동으로 가는 초록바위까지는 솔가지·장작장수가 왔으므로 '솔가지전 거리'라고 한다. 이 솔가지시장은 6.25전쟁 후에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장을 이루었다. 설대전다리(煙竹橋) 아래쪽에서는 서천교 사이로 담뱃대 장사들이 좌전을 벌였다.

남문밖장은 19세기 중엽까지도 2일장이었지만, 서문밖장이 7일에 섰으므로 서남방에서는 2·7일장이 서게 된 것이다. 전주의 사문외장은 개시일 뿐 아니라 취급하는 상품이 기능화됐다. 동문외장은 한약재와 특용작물의 판매, 서문외장은 소금, 깨와 같은 양념류와 어물의 판매, 남문외장은 생활품과 곡식 판매, 북문외장은 포목과 잡곡을 판매했다. 그 밖에 전주에서 20~30리 되는 곳에 소양 이성장, 봉상장 등이 섰다.

약령시는 도내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매상해 조정에 올리기 위해 개설됐다. 약초의 채취, 출하되는 시기에 따라 일년에 일정기간 동안 열리는데, 그 기간은 춘시가 3월 15일부터 25일, 추시가 10월 15일부터 25일까지였다. 장소는 다가동과 전동 사이의 약전골이었다. 그러나 200년 전쯤 공주에 약령시가 개설되면서 전주의 약령시는 시들해졌다. 1923년 한의약계 인사들이 모여 부흥을 시도한 결과, 출시인이 10여만 명에 이르고, 거래액이 10여만 엔에 달해 한때 대구의 약령시를 능가하기도 했으며, 1930년대 중반에는 거래액이 60만 엔을 넘었다. 그러나 1943년 공포된 '생약 통제령'에 따라 약령시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전주남부시장

개항과 경술국치 이후 경제가 식민지체제로 급속히 재편되면서 전주시장도 큰 변모를 겪었다. 상설시장이 개설됐지만, 그 곳에 점포를 갖고 전주의 상권을 장악한 상인들은 일본인이었다. 또, 농산물 외에도 공장제품인 석유·포목·성냥·고무신 등 일용잡화가 시장에서 거래됐다. 이전 전주시장이 전라도의 상업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점차 상실해 마침내는 남원이나 김제의 시장보다 거래액이 적게 됐다.
특히, 일본인과 조선인 대지주, 농업회사 등은 인근 평야지대에 생산되는 미곡을 발달된 교통망을 통해 전주를 거치지 않고 군산과 옥구로 반출했다. 조선인으로서는 군산과 줄포의 객주들이 미곡·어염을 통해 전라북도의 상권을 잡았다. 전주의 시장은 단지 전주 일원에 한정된 상권을 가질 뿐이었다. 1923년에는 납문밖장과 서문밖장을 합쳐 남문밖장을 만들었고, 1929년에는 전주객사 안에 있던 공설시장을 남문으로 이전해 어채시장을 설치했다. 1894년 동학혁명군이 전주에 입성할 때 불타버린 500여 호의 가옥 자리에 간이시장이 개설돼 1960년대 후반까지 지속됐다. 여기에 상설점포가 늘어나고, 시장건물이 개축돼 현재의 남부시장이 됐다. 남부시장은 해방 이후 1970년대까지 전북의 상업·금융·교통의 중심지이자 호남 최대의 물류집산 시장이었다. 그때 전주역(현재의 전주시청)에서 남부시장까지 화물을 실어나르는 마차와 리어카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전성기에는 남무시장에서 전국의 쌀 시세가 결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1980년대 도심 외곽에 대형아파트 단지와 상가들이 들어서면서 시장 상권이 잠식당했으며,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대형마트들이 들어서면서 상권이 크게 위축되고 있다.

◆비빔밥과 전주백반

한편, 1948년에는 진북동과 태평동 부근에 중앙시장이 신설됐다. 중앙시장은 북문밖 시장과 연관이 있는데, 이때 전매청까지 경편철도가 이어지면서 공구거리가 생겼고, 전매청 인근에 직원들이 많이 거주하게 되면서 그 주변으로 중앙시장이 자리를 잡게 됐다. 중앙시장은 포목과 각종 떡을 만드는 곳으로 발전했다.
1970년대에는 인후동과 진북동 주변에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적으로 봉동, 소양, 진안 쪽 사람들이 물건을 쉽게 거래하기 위해 건산천 하류지역 진밭다리 주변에서 물건을 판매했다. 하천 하류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모래내시장이 탄생한 것이다. 모래내시장은 신선한 야채 공급지가 됐다.
전주에 위치한 이들 시장이 지금은 미곡, 약령시, 우시장, 포목 등 모든 유통망을 뺏기고, 대형마트에 온갖 야채시장까지 뺏기고 있지만, 한때 시장이 한창일 즈음 국밥, 비빔밥, 각종 반찬 등과 맛있는 술이 탄생했다.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사람과 재료들이 모이다 보니 각종 음식재료가 모여 맛있는 음식이 개발된 것이다. 특히, 남부시장에서는 비빔밥과 전주백반, 막걸리, 해장국 등이 특색을 가지고 탄생해 전국적인 인지도를 가지게 됐다. 지금은 이러한 음식점들마저 많이 사라진 상태지만, 전주와 역사를 함께한 전통시장들은 다양한 스토리와 함께 전통 음식들을 부활시켜 관광객을 유치해야 한다. 남부시장에서 탄생했던 음식들과 이야기, 여기에 인심까지 풍성하게 더해진다면 전주시민 뿐만 아니라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전통시장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황성조기자(전주 전통시장 마케팅과 스토리텔링 동영상 강의를 유튜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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