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짙어졌다. 코끝을 기분 좋게 간질이던 바람은 날카로워졌고, 푸르른 나뭇잎에는 가을 색이 내려앉았다. 언젠가부터 이렇게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길목에 서 있는 계절이 오면, 나도 모르게 ‘낭만주의자’가 되곤 한다. 로맨틱이 아니라, 낭만이다. 달콤함을 품고 있는 로맨틱보다 쓸쓸한 낭만이다. 그리고 마치 의식처럼 영화 한 편을 찾아본다. 낭만 가득한 영화 <클래식>을. 사실 <클래식>을 처음 본 17년 전, 그러니까 20대 때는 뭐 이리 촌스럽고 빤한 영화가 다 있나 싶었다. 첫사랑과 첫사랑의 2세들이 또다시 사랑에 빠지는 스토리라니. 정말 영화 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이야기에 쉽사리 공감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한 해, 두 해 시간이 켜켜이 쌓이고 나니 나도 모르게 가을이면 이 영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

렇게 올해도 어김없이 이 계절, 이 영화를 떠올리고야 말았다. 그러다 우연히 영화 속 한 장면에서 익숙한 장소를 발견했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 인근이라 자주 놀러 갔던 바로 그 대학교 캠퍼스였다. 조인성과 손예진이 빗속을 뛰어가는, 너무나 유명한 배경음악과 함께 <클래식>의 결정적 장면으로 기억되는 바로 그 장면을 원광대학교에서 찍었다. 영화를 보며 빨간색 조형물을 발견하는 순간, 어찌나 반갑던지. 그래서 찾아갔다. 가을의 낭만 가득한 원광대학교 캠퍼스에. 벚꽃 명소로 유명한 캠퍼스는 알록달록한 나뭇잎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봄날의 활기는 없었지만, 가을의 캠퍼스는 생각보다 매력적이었다.

첫사랑의 아이콘, 첫사랑을 연기하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클래식> 속 배우 손예진을 떠올리면 이 문구가 떠오른다. 어느새 데뷔 20년 차를 맞이했지만, 손예진 하면 아직도 영화 <클래식>과 드라마 <여름향기>의 첫사랑 그녀가 떠오른다. 웃는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사랑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만 같다. 생각해보라. 말간 얼굴에 큰 눈망울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그 누가 빠져들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모습이 분명 연기인데도 연기가 아닌 진짜처럼 느껴져 가슴을 두드린다. <클래식>에서는 30년이라는 세월을 오가며 엄마와 딸, 1인2역도 거뜬히 소화해냈다. 1960년대 순수한 여고생 주희도, 2000년대 발랄한 지혜도 분명 손예진이라는 한 사람인데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여기에 엄마 주희의 첫사랑인 조승우와의 케미 역시 더할 나위 없다. 주희를 처음 본 준하의 표정은 사랑에 빠진 소년 그 자체였다. 이후 다소 억지스러운 전개도 연기력으로 보는 이들을 빠져들게 한다. 영화 후반부, 실명이 된 채 주희와 만나는 연기는 억지 눈물을 흘리게 하는 신파라면 질색인 내 눈물샘마저 터뜨렸다. 그에 반해, 딸 지혜의 첫사랑 상민으로 등장한 조인성의 연기는 아쉬움이 남는다. 개봉 당시 연기가 어색한 나머지 많이 편집돼서 ‘우정 출연’으로 이름을 올렸다는 우스갯소리가 돌 정도였으니 말이다.

영화는 한마디로 첫사랑과 첫사랑의 이야기다. 엄마인 주희의 첫사랑 이야기와 딸 지혜의 첫사랑 이야기가 교차 진행된다. 엄마 주희와 준하의 이야기와 딸 지혜와 상민의 이야기가 액자식 구성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 말미, 상민의 준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영화를 보면 너무도 쉽게 짐작이 가능한 사실이라 밝혀진다는 말이 무색하지만 말이다. 여하튼 엄마의 이루지 못한 첫사랑이 딸까지 이어져 결국 이루어지는 셈이다. 다소 무리한 설정과 전개지만, 첫사랑의 아이콘 손예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볼만하다.

첫사랑, 그리고 또 첫사랑을 담다
“어우, 촌스러워. 좋아, 클래식하다고 해두지.” 영화 초반 딸 지혜의 대사는 영화를 완벽하게 설명한다. 촌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래식하다는 그럴싸한 포장이 가능한 영화다. 앞서 말했듯 영화는 엄마와 딸, 그리고 아빠와 아들로 이어지는 첫사랑 이야기다. 엄마의 첫사랑의 아들이 딸과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가 억지스럽지만 영화니까 가능하고, 또 영화니까 이해가 된다. 엄마 주희(손예진 분)와 준하(조승우 분)의 사랑과 딸 지혜(손예진 분)와 상민(조인성 분)의 사랑은 묘하게도 똑 닮았다. 친구의 편지를 대필하며 그 대상과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이 그것이다. 삼각관계와 비 오는 날의 만남 역시 그대로 이어진다.

여기에 엄마 주희의 사랑 이야기는 황순원의 <소나기>와 다름 아니다. 순수한 시골 소년, 그리고 그 시골에 잠시 내려온 지역 유지의 손녀, 둘의 운명적 만남. 함께 비를 맞고 소녀는 앓고, 죽지는 않지만 시골을 떠나게 된다. <소나기>를 읽으며 첫사랑의 감정을 글로 배웠다면, <클래식>을 보며 첫사랑의 감정을 영상으로 배우게 된다.

엄마의 사랑과 닮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일까? 딸 지혜의 사랑 이야기는 현재가 배경임에도 고전적이다. 사실 삼각관계라는 설정부터 예스럽기 그지없지 않은가. 준하가 주희에게 쓴 편지와 상민이 지혜에게 전달되길 바라며 쓴 쪽지의 문구 역시 고전적이다.

‘태양이 바다에 미광을 비추면 나는 너를 생각한다. 희미한 달빛이 샘물 위에 떠 있으면 나는 너를 생각한다’는 괴테의 시 인용이 그것이다. 1960년대에도, 2000년대에도 똑같이 사랑을 전하는 문구로 쓰였으니 그야말로 클래식하다. 상민의 마음을 안 뒤 “우산이 있는데 비를 맞는 사람이 어디 저 하나뿐이에요?”라고 말하고 돌아서는 지혜와 그런 지혜에게 “가지 마. 다 알고 있잖아, 내 마음. 이제 다 알아버렸잖아”라고 말하며 붙잡는 상민의 대사 역시 참 클래식하다. 엄마와 아빠가 이루지 못한 사랑을 후대에 이루게 된다는 설정 자체도 얼마나 올드하고 식상한가. 아니, 클래식하다고 해두자. 이렇게 영화는 내용도 그 전개 방법도 제목처럼 아주 클래식하다. 촌스러운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클래식하다.

결정적 순간의 그곳, 원광대학교 교정
주희의 딸 지혜와 준하의 아들 상민의 결정적 순간. 단연 상민의 재킷을 우산 삼아 함께 빗속을 달리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자전거 탄 풍경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이 흘러나오며 두 사람의 마음이 같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 장면이 바로 원광대학교 박물관 아래에서 촬영됐다. 더 정확히는 나무 아래서 갑작스럽게 내린 비를 피하는 지혜와 그런 지혜를 보고 달려가는 상민의 모습을 촬영한 곳이다.
빨간색 조형물과 지혜가 비를 피하던 나무를 보는 순간 지혜와 상민, 즉 손예진과 조인성의 모습이 보이고,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이 들려오는 듯했다. 그저 조형물이고, 나무일 뿐인데 영화 속에 등장한 곳이라 생각하니 특별한 장소로 보이는 게 아닌가.

원광대학교 캠퍼스는 영화 속 장소가 아니어도 볼거리가 많다. 원광대학교의 상징과도 같은 곳, 수덕호도 그 중 하나다. 참 오랜만에 찾은 호수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호수 주변을 한 바퀴 돌다 보니 가을이 한가득 들어왔다. 동문 근처에 있는 원광대학교 자연식물원도 캠퍼스에 아름다움을 더한다. 아쉽게도 코로나19로 내년 2월까지 휴장 중이다. 그러나 너무 아쉬워할 일은 아니다. 계절은 돌아오기 마련이니, 벚꽃 만발하는 봄날 찾으면 되니 말이다.
글·사진 최수진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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