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암산 자락 대흥리 '솔티공방'

전북 정읍시에 가면 정상부의 바위가 갓을 쓴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입암산이 있다.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그 옛날 우금치를 넘지 못한 녹두장군 전봉준이 스며들었던 산이기도 하다. 태인 전투를 마지막으로 훗날을 기약한 전봉준 장군이 입암산성과 백양사 청류암을 거쳐 순창 피노리로 피신하였던 것.
  ‘솔티공방’은 바로 그 입암산 자락 대흥리에 자리하고 있다. 대흥리 버스 정류장 오른쪽으로 난 골목길을 끼고 한 10여 미터 들어가면, 푯말이 보인다. 베 짜는 공장을 리모델링해서 20년 넘게 일상생활에 쓰임새가 좋은 생활자기를 만들어왔으니, 웬만큼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모르지는 않을 터.

▲기 곤 씨가 물려받은 작은할아버지의 유품
  ‘솔티공방’을 끌어가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도예가 기 곤 씨. 그에게는 최근 몇 년 사이 짐이 하나 생겼다. 작은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맡기고 간 『홍재일기(鴻齋日記)』 때문이다. 조선시대 유학자 기행현(奇幸鉉), 족보명으로는 기태현(奇泰鉉)이라는 사람이 1866년부터 1911년까지 약 45년 간 쓴 7권의 일기. 2012년 이 일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서 가치가 부각되자, 소장자로서 자연스레 무게가 실리게 된 것.
  주산면 백석리 홍해마을에 살았던 작은할아버지로부터 이 일기를 받은 지는 근 20여 년이 다 되어간다. 기 곤 씨가 공방을 열고 난 직후였으리라. 23세 때부터 적어 내려간 일기의 주인공 기행현 또한 작은할아버지와 같은 동네에 살았던 인물이므로, 기 곤 씨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쯤 될 것이다.

  작은할아버지가 기 곤 씨에게 물려주고 간 것들은 『홍재일기(鴻齋日記)』뿐만이 아니다. 고창 반닫이장이며, 여러 서책들까지 해서 몇 박스는 족히 된다. 그 중 역사학자이자 임실군 학예사로 있는 김철배 박사에 의해『홍재일기』가 세상 밖으로 꺼내어지게 된 것이다.

▲동학농민혁명 일어나기 전 30년의 기록,『홍재일기(鴻齋日記)』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가 정읍이었다라고 하는 이유는, 전라감사 조병갑의 횡포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은 전라도는 말할 것도 없고, 전국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는 것을 또 알아야 합니다. 『홍재일기』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 30년사를 다룬 기록으로, 역사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자료입니다.”
  김철배 박사 말에 의하면, 『홍재일기』를 보면 당시 백성들이 왜 힘들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홍재일기』 전체에 걸쳐 눈여겨보게 되는 것이 있다. 조석(租石)과 미가(米價)가 월마다 1회에 걸쳐 45년간 기록되어 있다는 점. 이 미가의 변동과 19세기 후반 극심한 가뭄, 그리고 일본과 청나라의 미곡상의 등장 등을 통해서 동학농민혁명 이전의 부안과 고부 일대의 생활상을 밝힐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납전을 발행했으나 고액 화폐라 폐기된 것을, 부안에서는 1870년대 중반까지 통용되었다는 등의 내용도 일기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한 『홍재일기』는 1888년부터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해인 1894년 1월까지 나락 값이 떨어지지 않아 백성들의 궁핍이 심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수(貰數) 즉 세금의 종류가 늘고, 전 해의 세금이 이월되었다는 내용도 있다.
  천재(天災)라 할 만큼 지독한 가뭄에 이어 물가는 1891년부터 무려 5년간이나 떨어질 줄 모르고 지속적으로 오르기만 했다는 기록도 있다. 대개 춘궁기에 올랐던 곡가가 추수기에 하락하면서 안정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때다. 그런데 이 때는 추수기에도 곡가가 오르는 기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충해까지 더해졌다.
1869년 6월 30일. 어제와 같았다. 충해가 매우 심하다. 올해 농사는 고르지 못하다. 조 1석 8냥이고, 쌀은 1냥에 1두 2되이다.
-『홍재일기』, 1869년 6월 30일

1869년 7월 10일. 어제와 같았다. 배장흡이 왔다. 말하기를, 금년에는 쌀과 나락이 특히 귀하다. 마을마다 굶는 사람이 태반이다. 농사 형편을 점칠 수 없다.
-『홍재일기』, 1869년 7월 10일

  상황이 이렇다 보니, 『홍재일기』에는 1890년 ‘나주민란’소식이  언급된다. 주동자 나태원 등에 의해 그 해 4월 발생한 민란은 그들이 사망하는 10월까지도 계속되었다. 가뭄으로 인한 대흉년으로 민생이 편치 않았다는 얘기다.
  “쥐가 많아서 가뭄이 심하더라”, “가뭄이 심해 소머리가 벗겨졌다더라”와 같은 참요까지 돌았다. 간신들이 들끓고 있다는 표현으로 쥐 등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었다.
1890년 9월 27일. 어제와 같았다. 향교에서 허원숙을 만났다. 내년 년사(年事)를 물었더니 큰 가뭄에 대흉년이라고 한다. 연유를 물었더니 쥐가 많아서 그렇다고 한다.
-『홍재일기』, 1890년 9월 27일
  그리고 1891년에 들어서는 드디어 객사의 전패(殿牌)가 훼손되기에 이른다. 전패작변(殿牌作變)이 일어난 것이다. 조선시대 후기에 객사에 걸어둔 ‘전(殿)’자나 ‘궐(闕)’자를 쓴 나무 패를 전패라 하는데, 이를 훼손함으로 해서 민심을 드러내고자 했다.
  흉흉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해 나라에서는 기우제를 재냈다. 『홍재일기』에도 언급된 부분이다. 부안에서는 향교나 계화도, 직소폭포, 웅연(熊淵) 등에서 지낸 걸로 나온다. 높이 30m의 직소폭포는 예로부터 물이 마르지 않는 곳이라 하였고, 지금의 곰소인 웅연 또한 용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라 하였기 때문에 기우제를 지내기에 맞춤하였으리라고 본다.

▲동학농민혁명 ‘백산대회’ 날짜 명백해져
  실정이 이러한데, 전라관찰사의 공덕비를 마련하기 위한 비역전의 명목으로 세금이 거둬지게 된다. 그리고, 1892년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내용이 『홍재일기』에 최초로 등장한다. 초기에는 동학농민혁명군을 ‘동학당’ 또는 ‘동학도’로 표기되다가, 1894년 3월 26일 부안에서 백산봉기가 일어난 다음날인 27일부터는‘동학군’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다 ‘동학군’이 다시 ‘동학당’으로 표기되는 대목이 있는데, 일기를 쓴 기행현 자신의 감정이 드러난 부분이기도 하다. 이유인즉, 당시 기행현은 동학 입교를 제안 받았으나 거절한다. 그러자 그의 아들이 ‘동학당’들에 의해 끌려가 장독에 걸려 죽을 만큼 맞게 된 것이다.
  하지만 과거시험 공부를 하던 유학자였다. 끊임없이 향교를 드나들기도 하고 시를 짓고 외우던, 말 그대로 조선시대 선비였던 것이다. 1889년에는 ‘훈약(訓約)’이라 해서 지금으로 말하자면 ‘이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렇기에 ‘동학당’들에게 가서 아들을 살려 달라고 아쉬운 소리를 할 줄 몰랐다. 임시방편으로라도 동학에 입교하겠다는 말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생때같은 아들을 사지에 놓이게 만든 셈이다.
  어찌 되었든 그 동안 학계에서는 백산대회 날짜가 1894년 3월 25일이나 26일, 혹은 28일로도 얘기가 된 부분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홍재일기』를 통해 그 날짜가 26일로 명백하게 되었으므로, 큰 성과가 아닐 수 없다.
  백산대회는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에서 ‘혁명성’을 갖게 된 큰 사건이다. 전라도 일대 동학교도와 민중이 총집결한 이 백산대회에서 혁명군이 조직되었으며, 혁명의 대의를 밝힌 격문과 강령에 해당하는 4대명의, 그리고 혁명군의 군율이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1895년에 이르러서는 의병 모집을 한다는 격문 전체가 완전하게 옮겨 적혀 있는 부분도 있다. 같은 해, 승정원에서 처리한 사항을 매일 아침 기록하여 배포하던 관보(官報) 즉 조보(朝報)를 통해 알게 된 내용도 실려 있다. 고종 임금이 ‘민비’가 시해된 줄 모르고 강등을 시켰다가 몇 개월 지나서야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 등.

국가가 불행한 운세를 당하여 간신들이 시역의 권세를 농단하고 있다. 8월 20일의 변고를 어찌 차마 말로 할 수 있겠는가. 왜인들이 창궐하여 임금을 협박하고 어찌 차마 태공(흥선대원군)을 받들고서 국모를 살해하였는가.
(……)
우리들이 뜻을 같이 하는 동지를 이끌고 나가 흉역을 토벌하고자 한다. 원컨대 벼슬아치나 유생들, 그리고 팔도의 신민들은 메아리처럼 응해서 먼저 국내 역당을 토벌하고 왜인에 이르러서는 각국 사람들을 모아서 회판해서 법으로써 시행할 것을 매우 바란다.
세록지신[世祿之人]과 여러 민씨들은 나라의 은혜를 입고서 일세를 흔들고 있으니 이러한 불행한 때를 당하여 모두가 나라에 보국하여 목숨을 바칠 사람이 없으니 이러한 죄를 성토하고자 을미년 9월에 삼남유생들 심상천, 홍종명, 김홍규, 김창현, 김병택, 조병설, 임재호, 권용기 송노수, 윤자익 등이 발문한다.
-『홍재일기』, 1895년 11월 초1일

  다시 말해 『홍재일기』는, 기행현 자신의 가정사보다는 19세기 후반기 부안과 인근 지역의 실정을 전반적으로 기록한 기록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김철배 박사는 단순한 일기를 넘어 기행현이 거주하고 있는 주산면과 맞닿아 있는 지역들은,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명을 전후한 1866년부터 1911년까지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19세기 후반의 부안의 사회 경제적 상황을 비롯하여 한국사에서 주목되는 사건에 대한 지역민의 인식과 대응을 살펴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한다.
  전체가 한문 필기체로 씌어 있는 『홍재일기』는, 2013년 7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5년여에 걸쳐 정자체로 바꾸는 탈초가 끝난 상태이다. 그리고 현재는 한글 번역을 하고 있는 중이다. 입암산 자락의 ‘솔티공방’ 도예가 기 곤 씨가 소장하고 있는 7권의 『홍재일기』 외에 그의 작은할아버지가 물려준 또 다른 유품들도 시간을 두고 찬찬히 관심을 가져볼 일이다. 또 아는가. 우리가 모르는 더 큰 역사가 그 속에서 쏟아져 나올지.
/글 사진 김형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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