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처서가 지났다. 아직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절기상으로는 이미 가을에 접어들었다. 완연한 가을은 아니지만, 아침, 저녁으로 부는 바람은 선선해졌다. 그리고 이렇게 선선한 바람이 불 때면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조선 최초 야구단의 이야기를 그린 <YMCA야구단>이다. 해마다 가을이면 이 영화가 떠오르는 이유는, 가을에 개봉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가을하면 떠오르는 스포츠 ‘야구’를 소재로 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야구선수들은 ‘가을야구’에 진출하기 위해 땀을 흘리고, 야구팬들은 응원팀의 ‘가을야구’ 진출을 응원한다. 야구선수와 야구팬들에게 가을은 그만큼 특별한 계절이다. 그러니 야구팬인 내게 가을에 개봉한 야구를 소재로 한 <YMCA야구단>은 가을이면 응당 떠오를 수밖에 없는 영화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영화를 촬영한 장소다. 영화는 사계절 내내 아름답지만, 가을이면 더 아름다운 곳에서 촬영이 진행됐다. 전국의 향교 중에서 가장 유명한 향교, 전주향교가 그곳이다. 아직 이른 가을, 영화의 주요 배경인 전주향교 곳곳을 느리게 걸으며 찬찬히 살펴보았다.

대배우들의 풋풋한 모습을 보는 재미

<YMCA야구단>은 2002년 10월 3일 개봉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이날은 영화 속에서 오대현으로 분한 배우 고 김주혁의 생일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다시 영화를 보는 내내 2017년 10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그에 대한 그리움이 일기도 했다.

이 영화는 고소영과 임창정 주연의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의 시나리오를 쓴 김현석 감독의 데뷔작이다. 김현석 감독은 훗날 고등학생 괴물투수를 영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영화 <스카우트>에서 임창정과 다시 조우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대학 야구부 직원 임창정의 영화 속 이름이 <YMCA야구단>의 송강호와 마찬가지로 ‘호창’이라는 것이다. ‘호창’의 죽마고우 ‘광태’(황정민 분) 역시 감독의 <광식이 동생 광태>에 다시 등장한다. 이는 이 영화가 주는 깨알 같은 재미다.

앞서 말했듯 영화는 일제강점기 결성된 조선 최초의 야구단 이야기를 담고 있다. 1999년 발간된 『한국야구사』에 따르면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해, 기독교청년회 간사였던 필립 질레트의 지도 아래 황성 YMCA야구단이 결성됐다. 그리고 이 팀은 13년 동안이나 조선 최강 팀으로 명성을 날렸다. 한마디로 황성 YMCA야구단은 조선 최초, 최고의 야구단인 셈이다. 김현석 감독은 이 실화를 바탕으로 <YMCA야구단>이라는 따듯하고 유쾌한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는 야구를 소재로 역사적 사건들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그렇기에 장르는 코미디지만, 마냥 웃기기만 하는 영화는 아니다. YMCA야구단의 결성부터 갈등과 화합, 그리고 마침내 승리로 나아가는 이야기는 일제강점기의 항일운동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즐거움은 대배우들의 풋풋했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고 김주혁은 물론, 송강호, 김혜수, 황정민의 20여 년 전 모습을 확인하는 재미는 덤이다. 그러니 <YMCA야구단>을 보며 오랜 시간 우리 곁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그들의 모습과 연기를 감상하는 즐거움을 누려보는 것도 좋겠다.

조선 최초이자 최고의 야구단 이야기

학문에 뜻이 없는 선비 호창(송강호 분)과 그의 죽마고우 광태(황정민 분), YMCA교사 정림(김혜수 분), 그리고 일본 유학생 출신 대현(고 김주혁 분)이 YMCA야구단을 결성하고 활동하는 모습이 영화의 주요 골자다. 얼핏 야구 이야기인 듯 싶지만, 실상은 야구를 소재로 일본 제국주의를 타파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준다.
암행어사를 꿈꾸던 호창은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공이나 차며 하루하루 의미 없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뻥 차버린 축구공이 YMCA회관 마당에 떨어진다. 축구공을 찾기 위해 담을 넘어 들어간 YMCA회관에서 야구공을 처음 보게 된다. 캐치볼하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모습에 호기심을 느끼며 공을 핑계로 다시 한번 YMCA회관을 찾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방망이를 들고 등장한 정림과 처음 만난다.
“다듬이질 하는데 방해해서 미안하오~ 빨래 방망이인가?”
호창은 애써 야구에 대한 호기심을 숨기며, 정림에게 능청스럽게 묻는다. 그런 호창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운동 좋아하냐 묻는 정림에게 자신은 선비라며 부정의 뜻을 표한다.

하지만 그 후 정림과 외국인 선교사들이 야구하는 모습을 보며 야구에 대한 호기심을 나날이 커져만 간다. 서당을 물려받으라는 아버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점점 야구의 매력에 빠져든다. 그리고 마침내 호창과 광태는 정림이 이끄는 황성 YMCA야구단에 들어가게 된다. 이어서 일본 유학생 출신이자 강속구 투수인 대현이 합세하며 조선 최초의 야구단 YMCA야구단은 최강의 야구단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다 일본군 야구단 삼락구락부에게 첫 패배를 맛본다. 이후 야구단 활동과 항일운동이 이어지며,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는다. 그리고 영화 말미, 학처럼 고고한 선비의 꿈을 이루지 못한 호창이 학다리 타법으로 만들어낸 홈런으로 일본군에 승리한다. “4번하기 싫소. 재수 없고, 죽을 사!”라며 “나는 선비 사!”라고 외치던 호창이 4번 타자의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일본군과 야구단이 뒤엉킨 가운데 호창의 웃음과 함께 영화는 막을 내린다.

YMCA회관으로 등장한 그곳, 전주향교

호창이 처음 야구공을 접하게 되고, 정림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YMCA야구단 출정식을 열고, 호창이 야구 연습을 하는 곳. 영화 속 YMCA회관으로 등장하며 영화의 주요 배경이 된 이곳은 전주향교 명륜당이다. 명륜당은 고려말기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유학을 가르치던 강당이다. 조선 말기까지 수많은 학자와 정치인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명륜당은 앞면 5칸, 옆면 3칸의 규모로 전혀 단청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평일 오후, 고즈넉한 명륜당에 서니 호창과 정림, 그리고 대현의 모습이 스쳐 간다. 넉살 좋은 호창, 당찬 신여성 정림, 그리고 심지 굳은 대현의 모습이.

전주향교를 들어가는 누각인 만화루를 지나면 정원에 일월문이 나온다. 그리고 그 일월문 너머 대성전을 중심으로 동무와 서무가 자리 잡고 있다. 명륜당은 이 대성전 담 뒤에 자리한다. 서쪽으로 장판각, 계성사, 양사재와 사마재, 그리고 고직사 등의 건물이 있다.

전주향교는 대지 3130평에 총 19동, 100칸에 이르는 방대한 크기로 사적 제379호로 지정돼 있다. 대성전 중앙에는 공자를 비롯한 안자, 자사, 증자, 맹자 등 다섯 성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원래 전주향교는 경기전 옆에 세워졌는데 경기전이 지어진 뒤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에 태조 영령이 편히 쉴 수 없다 해서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다니다, 1603년 지금의 위치에 자리하게 됐다고 한다.
사계절 언제 찾아도 좋은 전주향교지만, 기왕이면 가을에 찾는 것을 권한다. 노란 은행잎이 내려앉은 향교는 그야말로 장관이기 때문이다. 비록 아직 은행잎은 푸르르고, 햇볕은 뜨겁다 못해 따가운 날에 찾은 향교에 아쉬움이 남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오는 가을에 다시 찾을 이유를 만들어줬으니 말이다.
땀 흘리며 돌아본 향교를 나서며 갑자기 호창의 대사가 떠올랐다.
“나는 휘는 공은 치지 않소. 그것은 정정당당하지 못하오.”

성격이 급해서 문제라며 직구만 노리지 말라는 대현에게 하는 호창의 말이다.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이 시기, 정정당당하게 맞서다 보면 분명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마지막에 시원한 한방을 날린 호창처럼. 그리고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으리라. 그 어느 때보다 힘찬 “플레이 볼!”을 외치며 말이다.
/글 최수진 자유기고가
/사진 전주향교 임영식 제공
<사진 설명>
1. 영화의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 전주향교 명륜당
2.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전주향교 대성전 동무
3. 노랗게 물든 전주향교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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