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화산 아래 옛 희현당에 세워진 신흥학교 학생인 이순재(李淳宰)는 늘상 천변을 거닐며 작은 돌멩이들을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자주 다가산에 올라 허물어진 전주 성곽을 바라보며 세상이 변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교실에 남아 책장을 넘기는 일보다 귀하게 얻은 몽당연필과 텁텁한 스케치북을 들고 다가산을 오르는 것이 즐거운 학생이었다. 다가산에 오르면 마치 요즘처럼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는 먹구름의 무거운 발길처럼 그의 가슴이 먹먹해 오는 것을 느끼곤 하였다. 서문 밖 전주천도 그렇게 흘러가는 듯했다.
 예전 전주 서문 밖은 풍류와 가무가 넘처나는 별다른 세상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피를 받았던 한 젊은 청년 이순재는 주체할 수없는 호기심을 스케치북에 담아 천변을 거닐었다. 예전 서문 밖 전주천과 그 건너 화산은 참으로 아름다운 풍광이었다. 화산(華山)은 전주천을 따라 동서로 길게 엎드려 전주 남쪽을 감싸고 있는 편안하고 아름다운 몸매를 가지고 있다. 봄이면 아카시아 향이 제법 물길이 너른 천을 건너 성 안까지 가득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이름도 화산이라 하였을 터인데, 무엇보다 화산은 그 머리맡에 마치 둥근 계란같이 매끄러운 자태를 지닌 다가산을 바라보고 있는 행복이 있었다. 사실 산이라 부를 것도 아닌 작은 체구이고 둥근 모양새가 어쩌면 전주천의 조약돌처럼 단단하게 잘 다듬어진 작은 산이다. 그렇다고 해도 몸에는 무성한 숲이 가득하였고, 전주천에 발을 딛고 수직으로 우뚝 서 있는 위풍은 감탄스러운 모습이었다. 다가산 절벽 아래는 유독 깊은 물길이 있어 사람들이 함부로 근접하기 어려운 기세가 있었다. 아마도 용이 내려와 놀다가는 듯 했다. 다가는 용머리와 가까이 있는 터이다. 그의 이름이 다가산(多佳山)이었던 것은 많은 선인들이 이곳에 내려와 풍월과 가무를 즐겼던 탓이다. 그 선인들은 분명히 북극을 상징했던 완산칠봉에서 용을 거느리고 내려온다. 그들은 마치 화랑처럼 다가산 아래서 활쏘기를 즐겼고 그리고 시조를 읊었다. 훗날 다가산은 전주의 적잖은 젊은 화가 지망생들이 화구를 펼치고 그림을 연마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다가는 아름다움이 많다는 단순한 뜻이겠으나 이미 오래전부터 전주 예인들의 고향으로서 준비된 터였다. 그 다가산을 바라보고 엎드려 있는 화산의 품안에 희현당서원(希顯堂書院)이 세워진 것은 또한 예삿일이 아니었다. 오래전 1701년 전라도 관찰사 김시걸이 현인이 되길 염원하였던 희현당서원은 훗날 1900년에 설립된 신학문당(新學問堂)이 이곳으로 옮겨와 1906년 신흥학교로 개명하고 호남 최초의 새로운 교육을 열어갔던 곳이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신미술의 새로운 꿈을 꾸었던 이순재는 참으로 눈망울이 초롱초롱하였던 젊은이였다.

▲ 호남 최초 서양화가 이순재 작품

이순재는 총명하였고 국문, 한문, 영어, 지리, 산술 등 여러 분야에서 우수하였으나 특히 도학 즉 미술에 남다른 호기심이 많았다. 그래서 학교에 머무는 시간보다 화구를 들고 전주천이나 다가산에 올라 내려다보이는 전주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그는 전주천의 새로운 목책다리를 건너는 것보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없는 징검다리를 밟는 것이 더 즐거웠다. 봄이면 윤기 흐르는 버들을 매만지는 것이 좋았고, 가을이면 물빛이 좋아 화산에서 내려와 하얗게 핀 억새꽃의 우아한 자태를 바라보는 것이 즐거웠던 학생이었다. 그렇더라도 언제나 다가산에 오르면 알 수없는 새로운 꿈에 가슴이 뛰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던 타고난 것이었다. 어쩌면 앞서 놀다간 칠봉의 선인들이 물려준 천분인지도 몰랐다. 그는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느꼈고, 그래서 새로운 길을 상상하고 있었다. 다가산이 내려준 운명이라 생각했을 터였다. 그래서 결심했다. 그리고 신흥학교 4학년 졸업을 미루고 새로운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믿음을 붙들고 일본으로 떠났다. 그래서 이순재는 전라도에서 가장 먼저 일본 유학을 떠나 소위 서양화라고 불리는 유화를 공부한 사람으로 남았다. 그 때가 아마도 1920년대 초라 알려져 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배워야만 했던 그의 열정과는 아무 상관없이 닭똥 같기도 하고 혹은 이상한 고약 같기도 한 유화라는 것을 일본미술전문대학까지 가서 공부하였다는 사실을 받아 주었던 그의 고향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큰 희망과 기대를 품었던 그의 가족들마저도 절망적이었을 터이다. 설령 새로운 것에는 언제나 모험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이순재에게는 버텨내기 어려운 무거운 날이 계속되었다. 귀국해서 조선미술전람회에 3번이나 입선했다는 것이 어쩌면 더욱 그의 가슴을 짓눌렀을 것이다.

그는 잠시 동광신문에 삽화를 그려가며 동문거리에서 탁주로 허기를 때웠다. 그러나 겨우 탁주 한 되 값밖에 안 되는 삽화료는 그를 더욱 곤궁하게 하였다. 그래서 또한 한 때는 간판점을 내어 가난을 비켜나볼 요량이었지만 그것도 자신의 길이 아니었다. 다만 그의 허기진 배를 붙잡아 준 것은 동광미술연구소를 개설했던 동료 박병수와 그림 이야기를 엮어가는 것이었고, 그가 그림의 길로 안내했던 후배 김영창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이었다. 더불어 이곳 동광미술연구소에서 이의주, 천칠봉, 이준성, 허은, 하반영, 배형식 등 훗날 지역의 출중한 미술가들을 배출한 것이 오직 그의 보람이었다.
 그는 끝내 붓을 오래 들지 못하였다. 당시만 해도 일본으로부터 수입해오던 유화물감을 구입하는 일은 참으로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런 일은 주변으로부터 쏟아지는 냉혹한 외면과 자신을 다스릴 수 없었던 가난의 고통을 견디는 것보다는 쉬운 것이었다. 그래서 최초의 서양화가 이순재의 붓은 전주천 조약돌보다도 더 단단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끝내 그의 꿈은 다시 다가산 밑 전주천의 소용돌이에 돌려주고 말았다. 그런데 당시 신미술이라 불렸던 유화를 이 땅에 들여와 실험하고자 하였던 이순재의 모험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듯하다. 그의 뒤를 따랐던 오늘날의 젊은 미술가들이 역시 동문 밖 막걸리 집에서 탁주한잔으로 허기진 저녁을 때우고 있는 모습에서 선배 이순재를 만나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음이다. 세상에, 우리가 오늘 더욱 부끄러운 것은 그에 대한 기록이나 삶의 흔적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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