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람들이 왜 굳이 시라 하고 소설이라 하며 글을 구분하였는지 새삼스럽다. 詩는 왜 고상한 언어라고 하였으며, 小說은 참으로 하찮은 이야기라 했는지 이해할 만하였다. 어느 글인들 사람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매한가지인 듯하나, 그럼에도 석정의 시는 참으로 뚜렷하고 광활하였다. 잔잔하고 맑은 것이 하필이면 난초 잎이었고, 수선 같았다. 그렇더라도 그 의지는 먼 천국이었고, 바다 넘어 끝이 없어보였다. 아마도 그의 산천이 그러했던 것 같다. 그의 고향 부안은 반도의 서쪽 끝 작은 복주머니처럼 생겼으나 보기에 따라 별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대륙의 희망이 맺혀 뻗어나 바다를 탐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석정은 분명코 그곳으로 부터 왔기에 그 땅의 염원을 깨워야 했다. 그것이 자신의 삶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한 올의 미련도 없었고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자신의 산촌으로 돌아왔다. 그 자리가 청구원(靑丘園)이었다. 지금 부안읍 선은동이다. 오늘은 주변이 많이 변해있지만 당시에는 마치 작은 새둥지처럼 아늑한 곳이었을 것이다. 앞뒤로 산이랄 것도 못되는 구릉이 감싸고 있어 청구라 했던가 보다, 그 때는 무성한 숲으로 싸여있어 종달새의 보금자리로 적격이었을 성 싶다. 뒷산에 올라 먼발치에서 달려드는 갯내음을 안아주곤 했더란다. 늘 푸르른 언덕에 서쪽의 가벼운 바닷바람이 자주 들러 가는 곳이었다. 부안 동중리에서 태어났으나 이곳 청구원에 터를 내고 첫 시집 “촛불”과 “슬픈 목가”등을 썼다. 그 자리는 그토록 우리 현대사의 큰 시를 엮어내기에 족했던 모양이다. 그의 나이 26살이었다. 스물여섯, 이제 세속을 알아갈 그 나이에 詩語를 캐러 다시 고향을 찾아 선은동에 書家를 세우고 청구원이라 했다. 그가 전주로 이사했던 1952년 무렵에는 측백나무 울타리가 무성했고, 벽오동, 산수유, 철쭉, 목련 등으로 마당이 좁았다 했다. 우리 산천 어느 곳에서도 무성했던 시누대도 빠지지 않았다. 우리 땅 어느 곳도 그러하던 것처럼 참으로 정겹던 풍경이었다. 그러나 오늘 청구원은 넓디넓은 정원에 옛 측백나무 울타리는 보이지 않았으나 매무새가 단정한 초가가 그나마 석정을 그리게 하였다. 석정은 이곳에서 “촛불”을 밝혔다.

그는 부안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25살에 잠시 서울로 옮겨갔었다. 그는 이미 소적(蘇笛)이라는 필명으로 “기우는 해”를 조선일보에 올려 촉망받는 시인으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의 젊음은 오직 시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세상은 시처럼 청명하지도 또한 여유롭지 못하였다. 그가 태어난 1907년의 세상은 이미 짙은 어두움이었다. 별도 달도 깊은 잠에 든 칙칙한 어둠에서는 아무도 새벽을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그가 생명줄처럼 붙잡고 매달리던 시 마저도 마치 깜박이며 빛을 잃어가고 있는 새벽녘의 실낱같은 초승달과 같음을 알았다. 서울에 잠시 머무는 동안 일제에 대한 찬양시 원고 청탁을 찢어 던지고 그길로 낙향하여 청구원을 세웠다. 그리고 그의 시는 결국 되찾아야 할 꿈을 찾고 있었다. 드디어 34살에 이르러 촛불을 세웠다. 그것은 깊은 호흡처럼 숙성된 기다림의 결과였다. 그는 앞서 쓴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에서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 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 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冥想의 새 새끼들이 .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林檎처럼 붉어질 때. 그 새 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중략)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인제야 저 숲 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은 그를 한국 현대시의 대표적인 목가시인(牧歌詩人)이라 부른다. 고향의 하늘을, 수평선을, 떠도는 바람을 노래했을 뿐만 아니라 청구원의 소소한 풀꽃들 그리고 그들의 작은 숨소리를 들어주는 새들의 날갯짓을 그의 붓은 기록했다. 그래서 목가시인이라 부르는 듯하다. 그러나 목가는 신의 음성을 말한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주님은 나의 목자(牧者)라 하지 않았던가. 그가 1939년에 첫 시집 ≪촛불≫에 이어 1947년에 두 번째 시집을 ≪슬픈 목가(牧歌)≫라 하였던 심중을 헤아려야 했다. 어쩌면 그는 태백의 가슴을 읽었을 것이다. 비록 긴 시간 촛불을 키고 빌었던 염원이 이루어졌을망정 그 어두운 시간을 견뎌온 이 땅 생명들의 가슴은 그러했다. 그에게도 해방은 사실 지독한 눈물이라는 말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부안을 사랑했다. 먼발치 서해에서 살랑살랑 달려오는 바닷바람을 사랑했다. 푸른 물빛이 힌 날개를 펴고 내려오는 작은 구름과의 대화를 엿듣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가 하면 “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그리워하였다. 그곳은 다름 아니었다. 그곳은 결국 자신의 고향 부안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미 결심하였다.  나이 스물에 조선일보를 통해 세상에 알렸다. “흙에서 살자”고 “날이 저물도록. 나는 앞들에 나아가 땅을 팠노라! 이마에 구슬 같은 땀이 나도록. 나는 힘들여 땅을  팠노라! / 오늘 하루를 땅을 팠으니. 내일엔 그곳에 씨를 뿌리노라! 새파란 엄이 난 뒤 . 고운 꽃이 진 뒤 . 아름다운 열매를 얻으려고- / 동무여! 내일엔 앞뜰에 나아가지 않으려느냐? 아름다운 열매를 얻기 위하여 . 씨 뿌리려는 앞뜰에- . 그리하여 우리는 . 길이길이 흙에서 살자”
 신석정은 그렇게 살았다. 그는 오직 고향의 은행나무, 야장미(野薔薇), 구름들 그리고 그 땅을 사랑했다. 그렇더라도 그는 스스로 “헤매이는 燈불”이 되어 나라를 잃은 젊은 날의 고통을 적었다. “(생략)나는 본다! 캄캄한 벌판을. 꺼질 듯이 꺼질 듯이. 혼자서 헤매이는 등불을-. 오! 이 더둔 밤을. 헤매이는 등불의 주인(主人)은 누구이며. 가는 곳은 그 어데런고?(생략)”그리고 이미 조국이 없는 나라에서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중략)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 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하고 조국이 다시 돌아오는 날 그는 새로운 희망을 키울 것을 약속하고 있었다. 남은 자들이 섣불리 그를 낭만시인으로만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부안은 그처럼 석정과 같은 큰 시인을 기르기에 오랫동안 준비된 곳이었다. 뿐만 아니다. 매창이라는 걸출한 여류시인을 앞세워 석정을 키웠다. 그 오랜 기다림은 이 땅에서 가장 혹독하고 짙은 어둠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시간들을 어루만지는 것이었을 것이다. 신석정(辛夕汀)은 1907년에 태어나 1974년까지 머물렀다. 망국의 절망 속에서 피어난 그의 시들이 이 땅의 현대사를 희망으로 위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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