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 바다는 우리에게 언제나 꿈이었고, 기다림이었다. 이 땅의 풍요를 서해에서 얻었고 또한 서해에 빌었다. 그 옛날 호기심이 많았던 마한 사람들은 서해를 떠나 머나먼 천측을 만났고, 나아가 페르시아까지 찾아들었었다. 그래서 한반도의 큰 줄기는 서해를 향해 마치 잔 뿌리를 내리듯 달려내려 왔다. 그 큰 발길의 한 끝이 변산이었다. 변산은 마치 태백의 엄지발톱처럼 독자적으로 형성되어 서해로 나아가는 길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뱃길은 엄숙한 것이어서 언제나 뱃사람들에게는 두려운 것이었다. 이 곳 변산 앞 바다를 사람들은 칠산바다라고 불렀다.

칠산바다는 지금의 영광군 칠산면 앞 7개의 섬에서 비롯되었으나 실상 변산 앞과 위도 주변의 바다를 함께 부르는 곳이었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고 바다와 육지를 잇는 여러 내력들이 이곳에 몰려들었다. 대해를 향해 큰 꿈을 가졌던 사람들이나 멀리 천측이나 지중해의 냄새를 들고 오려는 사람들에게 칠산바다는 언제나 두려운 대상이었으나 그러나 또한 포근하게 맞이해 주는 어머니의 품 같은 곳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이곳 수성당에 거처했던 개양할미 덕분이었다. 개양할미는 죽막동 수성당에 머물며 칠산바다를 관리하고 이 바다를 오가는 사람들의 안전을 도왔다는 여신이었다. 그랬던 개양할미는 분명 하늘에서 내려온 사도였다. 그 이름 개양(開陽)에서 우리는 그녀가 북두칠성을 상징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다. 즉 개양은 북두칠성의 여섯 번째 별이라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양할미를 마고할미와 같은 인물로 보기도 한다. 마고(mago)도 옛 메디아왕국의 여신이었다. 풍년 제사를 위한 농악놀이를 우리가 “당고마기 굿”이라 부르는 연유도 다르지 않다. 그리고 당고마기는 삼신할매로 이해된다. 어떻든 태양신의 전령을 받은 개양이 변산의 끝 용두산에 내려와 해신(海神)이 되어 칠산바다를 다스렸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로 읽어야 할 것이다. 개양할미는 삼신할매와 다르지 않아 아마도 三韓 즉 조선의 풍요와 평안을 위해 수성당에 자리했다고 볼 일이다. 오늘도 수성당 아래 칠산바다는 잔 물결에 비친 햇살로 진주 밭처럼 영롱했다. 너울대는 짙은 안개 속에서 한 겨울 낮잠을 즐기는 듯 작은 배들은 움직임이 없다. 칠산바다는 그렇게 고요했다. 거칠기로 소문난 칠산바다가 이처럼 얌전한 것은 분명 개양할미 덕분이리라.

수성당은 변산반도가 마치 바다에 풀어진 옷고름 사이로 볼록하게 삐져나온 개양의 젖무덤 같은 형상의 용두산 맨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북으로는 적벽강이 이어지고 남쪽 격포에는 채석강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을 죽막동(竹幕洞)이라 부른다. 죽막동은 그 이름에서 비롯되었는지 시누대 숲이 마치 성벽을 이루듯 어우러져 바닷바람을 가리고 있다. 수성당도 시누대 성문을 들어서야 만날 수 있다. 이곳은 발굴조사를 통해 우리나라 해양 제사문화를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유적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죽막동은 그 지형적 조건으로 바다를 관찰하기 가장 적합한 자리였고, 그 앞은 물길이 연안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흘러 조류가 급하고 또한 인근에 섬들이 많아 물길에 장애를 주어 물 흐름이 복잡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연안뱃길을 다녀야 했던 옛 뱃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길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이곳은 서해의 남과 북을 잇는 통로였고 멀리 중국이나 천측 등으로 나아가는데 반드시 지나가야했던 길이었다. 이 자리에서 바다의 신에게 안전을 빌 수밖에 없었던 연유였다.

그 해신제를 지냈던 제사 터는 시누대로 엮어진 성문을 들어서면 곧바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마련되어 있다. 단칸집의 수성당(水聖堂)과 기도처로서 돌탑, 배 모양의 제단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햇살이 맑다하나 겨울바람이 차고 어설픈 까닭일까. 풍악이 요란하고 오색비단으로 화려했을 제사의 풍경이 낯설기만 하다. 오늘처럼 한가하며, 소박하고 투박한 것이 오히려 해신의 속마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개양할미를 모시는 수성당도 전혀 화장 끼가 보이지 않고 무명옷을 걸친 누추한 모습으로 서있다. 개양할미는 아마도 용궁의 심청에게 뱃사람들의 안녕을 빌었을 것이다. 틀림없이 효녀 심청의 마음을 빌려 칠산의 거친 숨결을 달래었을 것이 분명하다. 멀리 바라보이는 섬, 임수도 앞 바다는 심청이 용궁에서 왕비가 되었다는 임당수라고 전해져 왔다고 한다. 개양할미의 마음이 심청의 속뜻과 다를 리 없었다. 개양할미는 여덟의 딸을 두었는데 팔도에 각기 시집보내고 막내와 함께 이곳에 머물렀다 한다. 이는 이곳이 조선팔도를 아우르는 기도처였고 또한 한민족 전체를 품에 않았다는 숨은 의미일 터이다.

소나무를 좌. 우에 두고 서있는 돌탑은 그에 관해 분명한 내력이 없으나 오늘도 촛불이 꺼지지 않고 기도처로서 개양할미를 대신하고 있다. 돌탑에 마련된 작은 제단에는 삶이 팍팍해 찾아온 어떤 사람들이 올려놓은 제물들이 올려져 있어 보는 이의 가슴을 더욱 시리게 한다. 탑 꼭대기는 마치 솟대처럼 불쑥 솟은 뾰족한 돌이 서있는데 맑고 깨끗한 진주목걸이가 걸려있다. 탑은 하늘의 신과 소통을 하는 “바람의 산”이라 불린다. 바람은 신의 목소리이고 사람들은 탑에 와 그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탑은 신들의 거처이며 다른 형태의 신전이다. 비록 수성당 문이 닫혀있어 개양할미를 만날 수 없지만 가슴 속을 풀어야 하는 사람들은 탑에 들러 바다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또 빌었다. 틀림없이 그 기도소리를 찬바람을 피해 여울골에서 쉬고 있던 개양할미는 다 듣고 있었을 것이다. 여울골은 용두암 옆으로  굴속처럼 패어있는 깊은 골이다. 수성당이 마련되기 오래전부터 이곳은 개양할미의 거처였고, 가끔은 파도를 타고 용궁에 다녀오는 곳이었을 것이다. 개양할미가 이곳에서 나와 크고 넓은 서해바다를 열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녀는 엄청난 체구였으며 커다란 나막신을 신고 바다를 걸어 다니며 뱃길을 다독였다고 한다. 그 길이 어찌 단순히 뱃사람들의 것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이 길은 삼한의 번영을 이루었던 문명의 길이었다. 그래서 매년 정월 보름 전후에 해신제를 지내고 개양할미를 그리워하였다. 옛 번영을 지금 죽막동에서 상상하기는 어려워도 분명 지금 우리의 풍요는 개양할미의 몫이 아닐 수 없을 터이다. 올 정초에는 더욱 큰 풍악이 울릴 것이다.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