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궁리 유적 발굴 전경

익산의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가 지난 7월4일 독일 본에서 개최된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가 결정되었다. 익산의 2개 유적과 함께 공주의 공산성, 송산리고분군, 부여의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나성, 능산리고분군 등 8개 유적을 백제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등재 되었다.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백제 왕도를 주제로 왕궁과 사찰, 방어시설, 왕릉 등의 유적으로 구성되었다. 
  사실 세계유산 등재 소식을 접할 당시에는 등재가 되었다는 것 외에는 별다를 느낌은 읒� 않았다. 그렇지만 길거리에 현수막과 베너기가 걸리고, 왕궁리유적 이정표에 유네스코 세계유산 휘장이 들어가고, 언론사와 방송에서 연일 보도가 이어지면서 메르스라는 복병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증가하는 관람객들을 보면서 점점 더 세계유산 등재 사실을 실감하고 있다.  
  왕궁리유적은 현재까지 조사 결과에 의하면 백제 무왕대에 왕궁으로 조성되어 일정 기간 사용하다 후에 사찰로 변화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여기서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 중 백제 왕궁으로는 유일하게 확인된 왕궁리유적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1. 왕궁리유적의 역사
  왕궁리유적은 익산시 왕궁면 궁성로 666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전에 사용하던 주소는 왕궁면 왕궁리 562번지다. 현재 사용하는 주소나 전 주소에서 모두 ‘왕궁’과 ‘궁성’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말이다. ‘왕궁’은 왕(임금)이 사는 궁전이고, ‘궁성’은 궁궐을 둘러싼 성벽을 의미하고 있어서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지명을 통해 이곳에 왕이 살고 있었던 왕궁이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왕궁’이라는 지명이 만들어지게 되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왕궁리유적과 관련된 직접적인 기록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국내 역사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중국에서 관음신앙의 응험 사실을 기록한 ‘관세음응험기’에는 백제 무광왕 즉 무왕이 금마인 지모밀지로 천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기록만 가지고는 무왕이 천도한 지모밀지와 왕궁리유적과의 관계를 직접 연결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역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국지지, 전라도읍지 등에서 보면 ‘군의 남쪽 5리에 옛 궁궐터가 있고 담장과 계단 돌이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궁리유적과 위치도 비슷하고 유적의 현상도 유사하여 왕궁리유적을 옛 궁궐터로 알고 있었지만 백제의 왕궁이 아닌 마한의 왕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왕궁리유적뿐만 아니라 미륵산성과 익산쌍릉 등 대부분의 백제유적에서도 볼 수 있으며, 부여지역의 백제유적에서도 나타나고 있어서 조선 후기에 있었던 삼한정통론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일대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과정에서는 익산군 제석면에 속했는데, 1916년에는 왕궁리의 궁평마을이 옛 궁궐터였기 때문에 왕궁면으로 변경되었다. 
                       

▲ 사찰 유적

2. 왕궁리유적의 발굴조사 전 상황  
  왕궁리유적이 한시기의 왕궁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궁리5층석탑을 제외하면 대부분 유적이 지하에 매몰되어 있었던 관계로 왕궁보다는 석탑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로 인하여 조선 후기에 편찬된 호남읍지나 익산군지도에는 탑을 형상화한 그림 옆에 왕궁탑 또는 탑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왕궁리5층석탑은 언제부터인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석탑이 북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기단부는 분구 모양으로 흙과 초석과 같은 석재로 덮여 있어서 기단이 없는 특이한 형태의 탑으로 오해받기도 하였다.
  1900년대 초부터 석탑에 대한 연구와 기울어진 석탑의 보수를 위한 노력의 결과 1965년 해체보수 과정에 1층 탑신부에서 사리병과 금제사리함, 금은제금강경판과 금동함, 기단부에서는 금동불상, 청동방울, 철편, 향나무 등 사리장엄이 발견되어 국보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3. 왕궁리유적의 발굴조사 
  왕궁리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는 1976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서 처음 시작되어 왕궁의 담장과 사찰유적에 대한 부분적인 조사가 이루어져 왕궁 내에 사찰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1989년부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유적정비를 위한 전면적인 조사가 이루어져 26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진행되고 있다. 조사결과 왕궁이 먼저 만들어져 일정기간 사용하다 후에 왕궁의 중요 건물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사찰이 들어서서 왕궁과 사찰은 운영시가가 다른 것으로 확인되었다.
  왕궁을 살펴보면 먼저 왕궁의 외곽에는 사구석과 장대석으로 폭3m의 장방형 담장이 동서 245m, 남북 490m로 돌려졌다. 그리고 남측 담장에는 4개의 문이 조사되었으며, 동쪽과 서쪽, 북쪽에서도 각각 1개소의 문이 있어서 총 7개의 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궁을 남북 절반으로 나누어 남측에는 왕이 의례나 의식을 행하던 정전과 정사를 돌보던 편전, 왕과 왕의 가족이 생활하던 침전 성격의 건물이 4단의 동서석축으로 구분 되어 배치되었다. 북측 절반은 정원(후원)과 백제시대에 가장 귀중품인 금과 유리를 생산하던 공방터와 화장실유적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왕궁 내의 공간은 중국이나 일본의 왕궁에서와 같이 일정한 계획에 의해 공간을 나누어 사용하였는데, 앞쪽에는 의례와 정무, 생활공간으로 활용하고 뒤에는 후원(정원)을 배치하였다.
  왕궁으로 일정기간 사용한 후 왕궁에서 사찰로 변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는 탑과 금당, 강당 등 사찰의 중요 건물이 들어서는 위치에 자리한 왕궁 건물은 철거하고 그 위에 사찰이 들어서게 된다. 그러면 왜 왕궁에서 사찰로 변하게 되었고, 그 시기는 언제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무왕은 돌아가신 후 부여의 백제 왕릉이 아닌 익산쌍릉에 묻혔다. 그런데 백제의 왕릉 주변에는 돌아가신 분의 명복을 비는 원찰이 있다. 예를 들면 부여의 왕릉 옆에서 확인된 능산리사지(백제금동대향로 출토지)가 관산성 전투에서 돌아가신 성왕의 명복을 비는 원찰이었다. 이와 같이 무왕이 익산쌍릉에 묻히게 되자 비어있던 왕궁을 사찰로 개조하여 무왕의 원찰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 토기완
▲ 금제품

4. 왕궁리유적의 출토유물 
  왕궁리유적에 백제 말기 왕궁이 있었던 사실은 ‘관세음응험기’의 기록과 왕궁의 배치와 구조를 통해서 살펴보았는데, 이것뿐만 아니라 이곳이 왕궁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줄 수 있는 유물이 출토되어야 한다. 현재까지 왕궁리유적 발굴조사 과정에서 1만여점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그중 금과 유리는 백제 최고 귀중품으로 왕만 사용할 수 있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왕은 금으로 만든 장식을 모자에 달고, 관리는 은으로 만든 장식을 달았다고 한다. 유리는 천연 옥의 생산이 적어 옥빛을 내는 다양한 색상의 유리를 만들어 사용하여 금과 함께 백제의 최고위 신분계층에서만 사용하던 귀중품이다. 또한 왕궁리유적에서는 도장이 찍힌 기와가 60여종이 출토되었는데, ‘수부(首府)’라는 도장이 찍힌 기와가 11점 수습되었다. 머리수(首)에 관청부(府)가 상하로 연결되어 백제 관청 중에서도 최고 높은 왕이 있었던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수부(首府)를 왕이 살고 있었던 수도(首都)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며, 중국식 발음으로 하면 서울이 되어 수부는 한 나라의 수도 또는 서울을 의미 하고 있다. 또한 가마솥을 축소해 놓은 것 같은 전달린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전달린토기와 ‘수부’라고 도장이 찍힌 기와는 부여의 왕궁으로 생각되는 관북리유적과 익산의 왕궁리유적과 같이 왕과 관련된 유적에서만 출토되고 있다.
  이 외에도 왕궁에서 사용된 뚜껑이 있는 그릇인 토기완은 백제토기 중에서는 가장 고운 흙으로, 최고기술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백제와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류 사실을 알려주는 중국청자편과 굴뚝 상부를 장식한 연가, 왕궁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한 벼루, 왕궁 내에서 뒤처리를 한 변기형토기, ‘왕궁사(王宮寺)’라고 새겨진 기와 등을 통해서 이곳이 백제 왕궁이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4. 왕궁리유적의 세계유산 등재 의미   
  왕궁리유적은 세계유산 등재기준 Ⅱ의 ‘한국과 중국, 일본의 건축기술과 도시계획 원리의 활발한 교류를 보여 준다’는 점이 인정되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왕궁리유적은 백제 왕궁으로서는 처음으로 확인 되었음에도 왕궁 배치와 구조를 통해 한국과 중국, 일본 3국의 문화 교류 흔적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왕궁리유적의 탁월한 보편성과 진정성, 완전성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정도로 충분하다는 사실이 인정된 결과이다.
  두 번째는 왕궁리유적의 세계유산 등재는 백제왕도 익산의 문화적 성격을 더욱더 구체적으로 밝혀내는 또 다른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사실 백제왕도 유산을 모아 백제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세계유산 등재가 이루어졌지만 익산을 이해하는 관점은 지역마다 큰 차이가 있다. 그로인하여 왕궁리유적의 세계유산 등재는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 되어 백제왕도 익산의 성격을 명확히 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다.
  세 번째는 세계유산 등재는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를 잘 못 판단하여 관광객 유치를 위한 개발 사업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세계유산의 보존을 위해 좋은 현상은 아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 되면 등재 효과에 의해 관람객이 많이 찾아오겠지만 여기서 더 욕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 세계유산의 보존을 위해서는 증가하는 관람객에 의해 유산의 훼손과 편익시설 설치로 인한 주변 환경의 영향까지도 검토해야 하며, 심할 경우는 관람인원을 제한해야 할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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