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살아 온 70년의 인생. 글을 몰라 서러웠던 시절이 있었다. 두 해전 겨울 책마을해리 한글교실에서 글씨를 배웠지만 아직도 막상 연필을 손에 쥐면 가슴이 벌렁거렸다. 대신 당신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그림으로 만들어가니 청춘의 고생이 파노라마 영화처럼 지나간다.

‘누구나 한 권의 책, 한 개의 도서관’ 노인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도서관 하나가 문을 닫는 다는 말이 있다. 누구나 가슴에 품고 있는 그 책 한 권을 꺼내 같이 나눠 본다. 고창 ‘책마을해리’는 마을 어르신들을 위해 이 길을 먼저 열었다.
지난 2월 고창 해리면 책마을해리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나성리 월봉, 성산, 유암, 매남 마을 등 4개 마을에 사는 15명의 동네 아짐들이 인형극 ‘수궁심청가’를 발표한 것이다.
좁은 공간에서 인형을 들고 조종하고 대사를 치는 동안 가끔 부딪치기도 하고 작은 실수도 있었지만 큰 박수를 받으며 공연을 마쳤다. 대부분 인형극은커녕 제대로 된 연극 한편도 경험하지 못한 아짐들이 펼친 공연은 공연 이상의 소중한 기억이었다.
이날 인형극은 준비 과정에서부터 여느 공연과 달랐다. 심청이, 자라, 용왕 등 13명의 등장인물 인형을 모두 아짐들이 직접 만들었다. 바느질을 통해 옛날 가족들의 옷을 손수 지어 입으시던 시절의 기억을 추억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글 읽는 속도도 느린 아짐들이 대사를 낭독하고 인형을 조종하는 일도 수월치 않았지만 그래도 인형극을 통해 아짐들은 다시 자신의 삶을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할 수 있었다.
“나성리 지역은 농사로 아주 바쁜 곳이에요. 특히 여기에 사시는 분들은 대부분 연세가 많으세요. 다 아시다시피 옛날 어머니 대부분은 학교 교육의 기회가 적었어요. 이곳도 예외가 아니어서 70% 정도가 학교에 다닌 적이 없고 설령 학교에 다녔더라도 초등학교 졸업도 흔치 않았죠. 그래서 지난 2013년 농사일이 한가해질 때인 겨울, 한글 교실을 마련했던 거예요.”
한글교실은 시작이었다. 책마을해리 이영남 실장은 한글교실을 마치고 또 다른 일거리를 준비했다.
프로그램 이름은 ‘누구나 한 권의 책, 한 개의 도서관’ 지역특성화문화예술교육 공모사업을 통해 지역의 가장 큰 자산인 어르신들의 기억과 생활을 기록하는 동시에 현재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프로그램이었다.
첫 번째 프로그램은 그림작가 이육남 실장의 ‘ 오방색 단청 그리기’
“어르신들이 글을 배우기는 했지만 막상 글씨를 쓰고 글을 짓는 데는 많은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어요. 아무래도 글보다는 그림을 편하게 받아 들이시더 라구요. 그래서 연필 대신 붓으로 첫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도화지 위에 먹지를 두고 그 위에 밑그림을 올려놓은 후 연필로 무늬를 따라 그리고, 완성된 밑선을 먹으로 덧입혔다. 고운 오방색 분채를 아교에 개서 전통방식으로 만든 물감으로 색을 칠했다. 자기의 작품을 보며 짓는 어르신들의 웃음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반가움이었으리라.
붓으로 시작한 프로그램은 ‘문자도’를 거쳐 어르신들이 간직한 평균 40년 농사 노하우를 공개하는 ‘농사일기’로, 인형극으로 까지 이어졌다.
인형극이 열리던 날은 바로 책마을학교 졸업식이었다.
이제 올해는 ‘밭매다 딴짓거리’라는 이름으로 지난해에 이어 지역특성화문화예술교육을 진행한다. 또한 해리초등학교 방과후수업도 계속 진행하고 있어 책마을해리는 지역 전 연령층과 호흡을 같이 하고 있다.
이렇듯 마을사람들을 엮어 나가는 책마을해리는 원래 초등학교가 있던 곳이었다.
해리초등학교 나성분교였지만 2006년 교육청 정책에 따라 매남마을 출신 이대건 촌장이 인수를 했다. 정확히 얘기하면 회수다. 학교 대지와 건물은 이 촌장의 증조부가 기증했던 것으로 증조부의 뜻을 이 촌장이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10만권의 책을 보유한 책마을해리는 책을 특성화한 여러 시설과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이곳에는 어린이·청소년 책을 정리한 ‘버들눈작은도서관’, 책을 기획하고 제작하는 ‘누리책공방’을 비롯해서 ‘책감옥’, ‘책마을텃밭’, ‘출렁전시동’, ‘나성사진관’, ‘별헤는집’ 등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 여러 시설들이 잘 섞여 있다.
또한 매년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캠프를 개최하고 이들과 함께 마을조사 등 지역의 일상문화를 알아가는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이영남 실장은 “책마을해리에서는 지역의 교육과 문화를 주민들과 함께 묶고 재해석하는 작업을 통해 사라져가는 공동체의 가치를 지켜나갈 계획이다”며 시골의 작은 움직임의 의미를 설명했다.
/이병재기자·kanad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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