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 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

■ 조선시대 조세의 절반이 전라도에서
들이 넓고 물이 풍부한 전라도 땅은 한반도의 최대 곡창지대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 민족은 다른 어떤 농사보다도 벼농사가 중요했고, 벼농사에 유리한 드넓은 들판과 잘 발달된 강줄기는 전라도가 최고의 곡창지대가 되는데 필요충분조건이 됐다.
하지만 옛 전라도의 민초들은 자신들이 피땀 흘려 농사지은 결과물을 충분히 향유하지 못했다. 극소수의 천석꾼, 만석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임대료나 세금을 내고 나면 근근이 끼니를 이어가는 수준에 불과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에서 거둬들이는 조세의 절반이 전라도에서 올라온 것이었다고 하니 전라도 백성들의 삶이 피곤하고 고단했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나마 백성들의 삶을 더욱 궁핍하게 했던 것은 바로 부패한 관리들의 탐학이었다. 이들의 횡포는 수많은 농민들의 등골을 휘게 하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다.
임진왜란 직후에는 국가 재정의 3대 요소인 삼정(전정, 군정, 환정)의 문란이 극에 달했는데, 땅이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꾸며서 세금을 받아내거나 젖먹이도 군적에 올려 군포를 받아내는 일이 횡행했다. 또 죽은 사람에게도 군포를 거두어들이거나 심지어는 친척이나 이웃에게 군포를 대신 물리는 일도 있었다.
산업혁명 직후 재빠르게 근대화를 이룬 서구 열강들이 경쟁적으로 식민지 개척에 나설 무렵, 이곳 전라도 땅에서는 부패한 탐관오리의 폭정에 항거한 민초들의 성난 함성이 들불처럼 솟아올랐다.
1894년 갑오년! 전라도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보국안민과 척왜양의 기치를 든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 것이다.
고부에서 처음 발단이 된 이 농민봉기는 한때 관군을 연파하며 전라감영이 있던 전주성을 점령하기도 했으나 끝내 한양으로 가는 길목인 우금치를 넘지 못하고 패퇴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118년. 한동안 동학이나 동학농민혁명을 논하는 것조차 금기시되던 시기가 있었는가 싶게 전국 각지에 동학농민혁명을 기리고 연구하는 단체가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졌다.
이같은 단체 설립은 김대중 정권 시절인 지난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본격화됐다. 문화관광부 특수법인으로 2010년 2월 설립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을 비롯, 전국 곳곳에 26개의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나 계승사업회가 설립돼 활동하고 있다.
설립지역은 정읍을 비롯해 고창, 김제, 전주, 남원, 삼례, 부안 등 전북지역이 가장 많고, 전남 장흥과 함평, 충북 보은과 청주, 충남 금산과 공주, 예산, 태안, 강원도 홍천, 경북 상주와 예천, 경남 사천, 서울과 광주 등 전국에 고르게 분포해 있다,
모두 해당 지역에서 동학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농민군이 조직돼 활동했던 곳들이다.
도내에서만 해도 혁명의 기폭제가 됐던 고부와 무장을 비롯해 태인, 원평, 금구, 삼례, 남원, 부안, 전주 등 도내 전역에 동학농민혁명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전북의 길을 찾아서> 두 번째 이야기는 동학농민혁명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는 ‘역사의 길’이다.

■ 농민 동원해 새 보 쌓고 수세 징수
동학농민혁명의 길은 정읍시 이평면 배들평야에서 시작된다. 한때 배가 들어왔대서 ‘배들평야’라고 했던 이곳은 일제때 지적도를 만들면서 ‘배 이(梨)’자 ‘이평(梨坪)’으로 오기한 것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이평 들녘에서 신태인 방면으로 정읍천이 흐르고, 정읍천 제방에 강암 송성용 선생이 비문을 쓴 ‘만석보유지비’가 세워져 있다. 제방 아래 이평 들녘에는 옛 신작로가 있었음직한 길 양 옆으로 유채꽃 단지가 조성돼 있다.
이평은 당시만 해도 고부군에 속했고, 고부군은 드넓은 배들평야에서 나오는 쌀과 인근의 줄포, 염포 등 포구에서 들어오는 물산이 집결하던 곳이었다. 또 고부군수는 종4품이었던 반면, 정읍현감은 종6품에 불과했으니 고부군수는 알짜 관직이었다.
그 무렵 한양에서는 아들을 낳으면 전라도에서 벼슬아치를 시키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하니 재물을 탐하는 탐관오리에겐 이곳만큼 먹잘 것이 많은 곳도 없었을 터.
1892년에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탐관오리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고부군수로 부임해 갖은 악행을 일삼다가 1893년 11월 익산군수로 발령됐으나, 두달여만에 고부군수로 재부임하는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조병갑은 부임 초부터 무고한 사람을 잡아 가둔 뒤 돈을 받고 풀어주거나, 부모에 대한 불효, 형제간의 불화, 남녀간의 음행, 잡기 등의 죄목을 씌워 양민들의 재물을 강제로 빼앗았다. 태인군수를 지낸 자기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돈을 강취했으며, 정읍천과 태인천이 만나는 지점에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필요하지도 않은 새 만석보를 쌓게 하고 이를 빌미로 고율의 수세를 부과하기도 했다.
이에 분노한 농민들은 1894년 1월 10일 동학의 접주 전봉준을 앞세워 고부관아를 습격하기에 이른다.
당시 농민군이 집결했던 말목장터는 북쪽으로 부안, 남쪽으로는 정읍, 동쪽으로는 태인으로 통하는 요충지에 위치해 있다. 현재는 이평면사무소가 자리하고 있으며, 불과 몇백미터 안 되는 장터거리에는 ‘녹두식당’, ‘동학식육점’ 등 동학농민혁명의 유적지임을 짐작하게 하는 간판들이 눈에 띤다.
애초 말목장터에 있던 감나무는 2003년 태풍으로 쓰러져 현재 황토현에 있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전시되고 있고, 그 자리에는 또다른 감나무가 심어져 있다.
1914년 일제때 이뤄진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평면 등 19개 면을 관장하던 고부군은 정읍시에 편입돼 일개 면으로 전락했다.

■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
고부관아를 습격한 전봉준은 조병갑이 불법으로 수탈한 수세(쌀)를 농민들에게 돌려주고 해산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조병갑을 파면하고, 고부군수에 박원명, 안핵사에 이용태를 임명해 사태를 수습하게 했으나 이용태는 오히려 봉기 가담자를 책출한다며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동학교도를 탄압해 원성을 샀다.
이에 다시 거사를 도모하기로 한 전봉준과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등은 1894년 3월 무장현에서 4,000여명의 농민군을 모아 '창의문'을 선포한다.
이것이 이른바 '무장기포'로 동학농민혁명의 1차 기병이다.
3월 20일 무장에서 거병한 농민군은 불과 4일만에 고부관아를 점령하고, 8,000여명으로 불어난 농민군은 백산성에 집결해 조직과 규율을 정비한다.
백산은 높이 50미터에 불과한 작은 산이지만 온통 평야지대로 둘러쌓인 그 일대 지형에서는 일망무제의 시야를 제공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곳에 농민군이 근거지를 둔 것은 지리적 잇점을 극대화하기 위한 당연한 귀결이었고, 수천의 농민군이 집결해 있는 모습은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이라는 말로 형상화됐다. 농민들이 앉아 있으면 이들의 무기였던 죽창만이 위로 삐죽이 솟구쳐 그 모습이 대나무 산과 같고, 서면 흰옷 때문에 백산이 된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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