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하면
가고 싶지만

섬에 가면
섬을 볼 수가 없다
지워지지 않으려고
바다를 꽉 붙잡고는
섬이,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를 수평선 밖으로
밀어내느라 안간힘 쓰는 것을
보지 못한다

세상한테 이기지 못하고
너는 섬으로 가고 싶겠지
한 며칠, 하면서
짐을 꾸려 떠나고 싶겠지
혼자서 훌쩍, 하면서

섬에 한번 가봐라, 그 곳에
파도 소리가 섬을 지우려고 밤새 파랗게 달려드는
민박집 형광등 불빛 아래
혼자 한번
섬이 되어 앉아 있어봐라

삶이란 게 뭔가
삶이란 게 뭔가
너는 밤새도록 뜬눈 밝혀야 하리

안도현의 <섬> 중에서 -

■ 63개 섬의 무리 ‘고군산군도’
새만금 방조제 개통으로 과거에는 섬이었던 여러 곳이 육지와 연결돼 사람과 차들이 오가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신시도로, 과거에는 군산항에서 배를 타고 1시간 이상 가야했던 곳이지만 지금은 군산시내에서 자동차로 10~15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뭍이 됐다.
신시도에서 주봉인 월영산(198m)이나 대각산(187m) 정상에 올라서면 인근의 ‘섬 무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해발 200m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봉우리들이지만 바닷면과 비슷한 높이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정상에 오르기까지는 상당한 수고를 감내해야 한다. 하지만 정상에서 바라보는 고군산군도의 아름다움과 일망무제의 조망 때문에 주말에는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는 섬들이 많이 모여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세종 때 이곳에 있던 수군 진영인 군산진(群山鎭)을 육지로 옮겨가면서 현재의 군산시가 됐고, 이곳엔 ‘옛 고(古)’자를 붙여 ‘고군산’이라 했다.
고군산군도에는 선유도를 비롯한 16개의 유인도와 47개의 크고 작은 무인도 등 총 63개의 섬이 점점이 흩어져 있다.
섬의 형태가 너울너울 춤을 추는 무당의 모습과 흡사하다는 ‘무녀도’, 높은 봉우리가 없고 구릉으로만 이어져 마치 이끼가 피어나는 것과 같은 지형이라 하여 ‘개야도’(누구든지 들어와 살면 잘산다는 의미로 개야도라고 한다는 속설도 있음), 부근 해역의 어자원이 풍부해 ‘파시’로 유명했던 연도 등 하나같이 사연없는 섬이 없다.
고군산군도의 유인도 가운데 가장 작은 장자도는 몽돌해안과 기암이 어우러진 해안 산책로가 마치 수석 전시관을 보는 듯하다. 예전에는 멸치로 유명했던 곳이지만 지금은 낚시꾼들이 많이 찾는다.
물 맑기가 거울과 같다는 ‘어청도’는 등대로 유명하다. 중국 제나라의 전횡이 재상을 지내다 왕이 되었으나, 한나라가 중국 천하를 통일하자 추종자 500명을 이끌고 어청도에 피신하여 밭을 일구고 고기를 잡으며 최초로 정착했다. 하지만 전횡은 한왕 고종이 보낸 사자에게 붙들려 본국으로 잡혀가던 도중 바다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이후 백제 옥루왕 18년에 ‘치동묘’라는 사당을 지어 전횡의 넋을 위로했으며, 지금도 마을 사람들이 사당을 돌보고 있다.
‘밤 야(夜)’자와 ‘맛 미(味)’자를 쓰는 ‘야미도’는 원래 밤나무가 많아 밤섬이라 불렸으나 차츰 밤이 뱀으로 변해 ‘뱀섬’이라고도 불렸다.
앞에 있는 횡경도가 바다 바람을 막아 아늑한 곳이라는 뜻에서 ‘지풍금’ 또는 ‘신치’라고 불리던 ‘신시도’는 1910년 한일강제병합 후 전일재 선생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신시도라고 했다.
이밖에도 본래 ‘꽂지섬’으로 불리던 관리도, 섬 모양이 거북이 모양의 방축도, 물 맑기가 이를데 없다는 명도, 기러기가 나는 형상의 비안도, 곡식을 담는 말 모양의 두리도, 조선 중기까지 무인도였던 말도 등 여러 섬들이 저마다 사연을 간직한 채 ‘바다를 꽉 붙잡고’ 있다.

■ 선유도-무녀도-장자도 다리로 연결
고군산군도의 맏형격인 선유도는 ‘신선들이 노닐던 섬’이라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아름다움과 호젓함, 낭만이 깃든 섬이다.
선유도에는 거대한 바위 봉우리 2개가 우뚝 서 있는데, 유배를 온 신하가 매일 산봉우리에 올라 한양 땅을 바라보며 임금을 그리워했다 해서 망주봉으로 불린다.
보통 20분 정도 땀을 흘리면 망주봉 정상에 오를 수 있는데, 망주봉 정상에서는 장자도, 관리도, 보농도, 광대도, 횡경도, 야미도, 신시도, 무녀도 등 고군산군도의 여러 섬들을 조망할 수 있어 ‘서해 제1의 낙조대’로 꼽힌다. 고창 선운산과 부안 변산 월명암에도 낙조대가 있지만 낙조의 격은 망주봉에 비해 한 수 아래로 친다.
망주봉의 ‘낙조’를 비롯해, 만선을 이룬 돛배가 깃발을 휘날리며 돌아온다는 ‘삼도귀범’, 신시도 월영봉의 단풍, 선유도의 ‘평사낙안’, ‘명사십리’, ‘망주폭포’, 장자도의 황금어장을 상징하는 ‘장자어화’, 고군산의 방벽 역할을 하는 방축도와 말도 등 12개 섬의 산봉우리가 마치 투구를 쓴 병사들이 도열하여 있는 모습과 같다는 뜻의 ‘무산십이봉’ 등이 ‘선유8경’으로 꼽힌다.
선유도와 무녀도․장자도를 잇는 선유대교와 장자대교가 1986년 개통되면서 선유도와 무녀도, 장자도는 한 묶음이 됐다.
선유도 바로 앞 신시도까지 새만금방조제가 연결돼 있어 앞으로 신시도와 무녀도가 다리로 연결되면 신시도~무녀도~선유도~장자도가 모두 이어지게 된다.
선유도와 인근 섬이 연결돼 있기 때문에 배를 타고 선유도에 들어와서 걷거나 자전거를 이용해서 인근 섬을 둘러보는 것은 필수 코스가 됐다.
자전거로 선유도를 한 바퀴 둘러보고 장자도를 거쳐 대장도까지 다녀오는 데 1시간이면 충분하고, 무녀도를 다녀오는 데도 1시간이면 넉넉하다. 이런저런 구경을 한다 해도 3시간이면 여유 있게 네 개의 섬을 모두 둘러볼 수 있다.
선유도는 옛날엔 3개의 섬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파도에 쓸려온 모래가 오랜 세월 쌓여 언덕을 만들면서 지금처럼 하나로 연결됐다. 바로 ‘선유 8경’의 하나인 명사십리 해안이다. 십리라 하지만 실제 길이는 1.5km에 불과하다. 그러나 백사장의 폭이 200m에 이르고 수심은 어지간히 멀리 나가도 2m 정도에 불과하니 가족 피서지로는 그만이다.
갯벌 체험을 즐길 수도 있다. 썰물 때 갯벌에서 소금으로 맛조개를 잡을 수 있는데, 갯벌에 나 있는 구멍에 소금을 조금씩 뿌리면 맛조개가 삐죽이 고개를 내민다. 반쯤 올라왔을 때 잽싸게 잡아채면 된다. 또 바지락, 모시조개 등을 캐고, 소라를 줍거나 농게, 달랑게를 잡을 수도 있다.

■ 고군산군도와 관련된 전설 풍부
고군산군도의 여러 섬은 그와 관련된 전설도 풍부하다.
▲고군산(古群山)의 유래
고려초에 부안 하서면 장신포라는 어촌에 곽씨(郭氏)라는 노인이 혼자된 과부며느리와 손자 하나를 데리고 살고 있었다. 어느날 한 도사가 찾아와 뒷산에 있는 장군석 코에서 피가 흐르는 날에는 마을 일대가 망망한 바다가 될 것이니 주의하여 살펴보았다가 피가 흐르면 지체없이 멀리 피난을 가라고 하면서 사라져 버렸다.
노인이 손자를 등에 업고 매일같이 장군석 코에서 피가 흐르는지를 살피고만 있자 답답한 생각이 든 며느리는 어느날 시아버지 몰래 장군석의 코에 빨간 물감을 칠하였다. 이것을 본 노인은 ‘바로 그때가 왔다’면서 피난가기를 재촉했으나 며느리는 자기가 한 일이라고 웃으며 떠나기를 거부했다. 결국 노인은 손자만 데리고 마을을 떠났는데 노인이 살던 마을과 인근 3개 마을이 순식간에 망망대해로 변했다. 이 때 바다에서 여러 섬들이 불쑥 솟아올라 고군산군도라고 했고, 노인이 그 땅에 거주하면서 지금의 곽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신시도 임씨(林氏) 할머니 전설
신시도에 임씨 성을 가진 사람이 딸을 하나 낳았는데 그 딸은 태어나면서부터 손가락을 펴지 못하고 양손 모두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딸이 스무살을 넘어 혼례식을 앞둔 어느날 갑자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지관과 동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인부들이 대각산 줄거리 용머리 옆에 묘쓸 곳을 파자 갑자기 뿌연 연기 같기도 하고 흰구름같은 것이 돌더니 하얀 학 한 마리가 깃을 펄럭이며 날다가 그만 떨어져 죽어버렸다.
그런데 이를 지켜보던 딸도 갑자기 쓰러지며 죽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이때까지 펴지지 않던 주먹이 펴졌는데 친척과 주민들이 죽은 딸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니 임금 ‘王’자가 그려져 있었다.
다음 날에는 딸이 시집갈 때 쓰려고 기르던 큰 돼지 8마리가 모두 죽어버리는 일이 또 발생했다. 마을 사람들은 임씨 처녀를 학이 나온 그 자리에 묻어주고, 아버지 임씨는 그 옆에, 또 돼지들은 마을 뒷산 마루에 잘 묻어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딸이 비록 처녀였지만 임씨 할머니라고 칭하며 대대로 섬겨오고 있다

▲ 장자도의 장자할머니 전설
장자도에 한 선비가 부인과 아들 하나를 두고 살았는데, 어느해 선비가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떠나자 부인이 매일 산에 올라 금의환향을 학수고대했다. 어느날 남편이 장원급제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을 등에 업은 채 산마루로 달려 올라가 남편을 기다렸지만, 막상 남편은 과거에 급제도 하지 못한 채 새부인까지 맞아 아들까지 낳아서 데리고 나타났다. 부인이 크게 상심해 돌아서는 순간 등에 업고 있던 아기가 힘을 쓰는 바람에 선채로 돌로 변했다고 한다. 지금도 장자할머니 바위에는 새끼줄이나 흰 천이 둘러져 있다.

▲ 내초도 금돈시굴(金豚始窟) 전설
경주 최씨(慶州崔氏)의 시조로 신라말엽의 대석학인 고운 최치원은 높은 학문으로 멀리 중국에까지 알려진 학자였다.
원래 경주최씨의 시조는 ‘금빛나는 돼지(金豚)’에서 낳았다하여 일명 ‘돼지최씨’로도 불리는데, 그 설화는 내초도와 연관이 깊다.
최치원의 아버지가 하루는 내초도로 사냥을 나갔다가 누런 돼지한테 붙들려 바위밑 토굴로 끌려가 몇 달을 살았다. 그러는 동안 돼지에게 태기가 있어 열달 후에 아들을 낳았고,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육지로 나오려고 했으나 방법을 찾지 못했다. 아들이 다섯 살 되던 해 아버지는 돼지가 없는 틈을 이용해 아들에게 “너를 육지로 데리고 나가 공부를 시키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나 빠져나갈 재주가 없다”고 한탄했다. 아들은 황돼지가 날마다 물어다 놓는 나무토막을 몰래 엮어서 뗏목을 만들어서 타고 나가자고 제의했고, 어느날 황돼지가 나무를 하러나간 사이 뗏목을 타고 육지로 향했다. 이것을 알아챈 황돼지가 헤엄을 쳐서 쫓아오자 아들은 배에 있던 나무토막 하나를 던져주었다. 욕심이 많은 돼지는 나무토막이 아까워 이를 물어서 섬에다 가져다놓고 또 쫓아오기를 반복하다 끝내는 기운이 빠져 죽고 말했다. 그 아들이 바로 경주최씨의 시조요, 신라의 대문장가였던 최치원이었다.

▲ 신시도와 최치원
최치원은 신시도에도 머물렀던 것으로 전한다.
신시도는 고군산군도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섬으로, 주변에 청어가 많아 이를 잡기 위해 신라 초기에 김해김씨가 입주하여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어느날 옥구에서 서원을 하던 고운이 해변가인 하제에서 서해를 바라보다 신시도의 우뚝 솟아있는 월영봉에 반해 뗏목같은 풍선(風船)을 타고 신시도에 도착했다.
신시도에서 월영봉에 오른 고운은 그곳을 월영대라 칭하고, 돌담을 쳐 거처를 만들어 놓고 생식을 하며 글을 읽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최치원의 자가 ‘고운’이었음에도 ‘해운’이라는 자를 별도로 지어 신시도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소문관기자․mk7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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