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의미 - 정읍 무성서원

최근 정읍 무성서원 등 전국 9개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다. 9개 서원은 무성서원 외에 도동서원(대구 달성), 남계서원(경남 함양), 소수서원(경북 영주), 옥산서원(경북 경주), 도산서원․병산서원(경북 안동), 필암서원(전남 장성), 돈암서원(충남 논산) 등이다. 이들 서원은 모두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서원(書院)은 조선시대에 성리학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지방에 세운 사학(私學)을 일컫는 말이다.
중종 37년(1543) 풍기군수 주세붕이 순흥에서 고려의 학자 안향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이듬해 ‘백운동서원’이라 한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명종 5년(1550)에는 풍기군수로 재임하던 퇴계 이황의 건의로 왕이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하사했다. 사액은 편액 뿐만 아니라 서원의 유지관리를 위한 책과 노비, 전결 등이 부수적으로 동반됐다.
서원은 명종 때에 거의 20개 가까이 세워졌으나 선조 때에 이르러서는 50여개가 추가로 세워지고 그 가운데 21개가 당대에 사액을 받았다.
하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서원이 많아지고, 점차 권력화돼 면세를 목적으로 하거나 가문의 권위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전락하자 1871년(고종 8) 대원군에 의해 대대적인 개혁조치가 단행된다. 대원군은 당시 679개의 서원 가운데 47개의 사액서원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강제 폐지시켰다.
일반적으로 서원은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사당, 교육을 담당하는 공간인 강당, 유생들이 공부하며 숙식하는 공간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로 구분되어진다.
택지는 음양오행설과 풍수지리설에 따라 적당한 위치를 선택했는데 거의 앞이 낮고 뒤가 높은 구릉지가 많다. 남쪽에서부터 정문․강당․사당을 일직선상에 두고, 그 양쪽에 동재와 서재를 배치했다. 사당에는 따로 담장을 쌓고 내삼문(內三門)을 만들어 통행하도록 했다. 또 담장을 높지 않게 세우고, 일부를 터서 내부에서 밖의 자연과 접할 수 있도록 했다.

최치원, 신잠, 정극인 등 7현 배향
정읍시는 전북지역에서 서원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칠보면 무성리에 있는 무성서원을 비롯해 북면의 남고서원, 덕천면의 동죽서원과 도계서원, 이평면의 창동서원 등이 면면이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사적 제166호 무성서원은 신라 말 최치원이 태산군수로 군민의 칭송을 받다가 합천군수로 떠나게 되니 그를 흠모하여 생전에 월연대에 생사당을 세우고 태산사라 부른 것이 시초였다. 이 사당은 고려 말에 훼파됐으나 성종 14년(1483)에 유림들의 발의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중종 39년(1544)에는 태인현감으로 신잠이 부임하여 7년 동안 선정을 베풀다가 명종 4년(1549)에 강원도 간성군수로 이임하니 역시 주민들이 생사당을 세워 그를 기렸다.
결국 숙종 22년(1696)에 ‘무성(武城)’이라는 사액을 받고 두 사당을 병합하여 ‘무성서원’이라 했다. 그 뒤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 김관 등을 추가로 모셔 칠현을 배향하게 됐고, 정조 8년(1784)에는 쌍계사에서 최치원의 영정을 가져다 모셨다. 하지만 이 영정은 현재 행방이 묘연하며, 어진 화가인 채용신이 그린 모사본이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무성서원은 고종 5년(1868년) 단행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당시 현감과 유림 등의 청원으로 화를 면했다. 당시 전국의 수많은 사원 가운데 47개만이 살아남았는데, 전라도에서는 무성서원과 함께 장성의 필암서원, 광주의 포충사(褒忠祠)만이 철폐되지 않았다.

마을 근처에 위치, 건물이나 규모도 소박
무성서원은 다른 서원들이 비교적 민가와 떨어진 곳에 넓게 터를 잡아 자리한 것과는 달리, 민가 근처에 위치해 있는데다 건물이나 규모도 퍽이나 소박한 모습이다.
무성서원은 모두 4채의 전각과 2개의 문으로 구성됐다. 하나의 중심축선을 중심으로 누각과 강당, 사당이 일렬로 배열돼 있다.
가장 먼저 방문객을 맞는 건 문루(門樓)인 ‘현가루(鉉歌樓)’다. 현가루는 논어의 ‘현가불철(絃歌不輟)’에서 따온 말로, ‘거문고를 타며 노래함을 그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말은 공자가 진(陳)․채(蔡)․광(匡)나라에서 횡액을 당하면서도 현가를 계속했다는 뜻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힘든 상황이 되어도 학문과 수양을 계속한다’는 의미다. 대문과 기둥을 붉게 칠한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나무의 원형이 그대로 살아있는 것은 물론 건축학적으로도 절묘한 구도가 돋보인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단층 기와집인 강당은 대청마루가 앞뒤 모두 문이나 벽이 없이 시원하게 툭 터져 있다. 마당이나 누각에서 바라보면, 강당을 지나 사당의 문이 보이고, 사당 영역이 모든 시선의 중심을 이룬다. 사당을 강조하는 것은 강학을 하면서도 제향(祭享)을 하는 공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강당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단칸 협실이 있으며, 우측의 강수재와 좌측의 흥학재를 합하여 동․서재를 이루고 있다. 강당은 순조 25년(1825)에 불타 없어진 것을 3년 후에 중건했다. 사방이 트여서 선황산을 내려온 바람이 금새 마루에까지 와 닿는다. 강당 지나 높게 조성된 내삼문을 통과하면 사당인 태산사가 나온다. 태산사의 현판은 석전 황욱이 새로 써 달았다.
태산사에는 최치원을 가운데 중심에 두고, 오른쪽에 정극인․신잠․송세림, 왼쪽에 정언충․김약묵․김관을 배향했다.

고고한 학맥과 의병궐기 의기 서린 곳
무성서원이 위치한 곳은 칠보면 무성리 원촌마을로, ‘서원이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무성서원은 이 일대 유교문화의 심장으로 꼽힌다. 고고한 학맥을 이어준 선비들을 배향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국운이 격랑에 휩쓸렸을 때 분연히 붓을 던지고 칼을 잡은 선비와 백성들의 의기가 서린 곳이다.
무성서원 담장 밖에는 이곳 선비들의 의기를 기념한 ‘병오창의기적비’가 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6년 이 곳의 선비들은 나라를 위해 거병하기로 결의하고, 충청도 청양에 연금중이던 면암 최익현을 맹주로 옹립했다.
면암은 변장하고 7일 밤낮을 걸어 산내면에 들었는데 마침 이곳에서 시묘살이 중이던 임병찬을 만나 뜻을 합하고 4월 무성서원을 본거지로 창의하였다. 800여명의 의병이 순창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으나 정시해 등이 순국하고 임병찬과 최익현은 대마도에 유배됐다. 면암은 굶어서 순절하고 말았다.

‘태산선비문화’ 정신 계승해야
정읍시는 이처럼 선비들의 기개와 고결함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무성서원을 중심으로 ‘태산선비문화권’ 개발을 추진중이다.
지역으로는 신태인 일부와 태인, 칠보, 산외, 산내, 옹동, 북면 등이 해당된다.
이곳에는 3개의 서원과 10여개의 사우, 20여개의 효열정려, 10여개의 누정이 산재해 있으며, 호남 제일정으로 손꼽히는 ‘피향정’, 최초의 향약인 ‘고현동향약’, 김동수가옥 등 국가지정문화재가 즐비하다. 또 태인동헌과 태인향교, 마을굿과 무당굿, 특히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술마시는 예법인 ‘향음주례’가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이밖에도 불우헌 정극인이 남긴 ‘상춘곡’을 비롯해 조선말기의 어진 화가인 석지 채용신, 서예가인 동초 김석곤 등 시(詩)․서(書)․화(畵)․악(樂)을 통해서도 정읍 예술문화의 정수를 꽃피웠다.
최치원 선생의 흔적이 남아있는 무성서원과 태인 피향정, 불우헌 정극인의 상춘곡, 칠보면 시산리의 정순왕후 태생지, 면암 최익현선생과 돈헌 임병찬 장군 등의 거병 등 유서깊은 문화자원을 계승하겠다는 취지다.
태산선비문화사료관 안성열 관장은 “고운 최치원이 태산풍류를 창시했고 불우헌 정극인에 의해 태산풍류가 완성됐다”며 “면면이 이어온 태산 지역의 선비정신은 정신문화 뿐만이 아니라 국난을 맞아서는 의병을 궐기하는 등 실천적 측면에서도 본받을 점이 많다”고 말했다.
/소문관기자․mk7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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