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의 미 - 익산 숭림사 보광전

전라북도의 북쪽 끝단에 위치한 익산은 마한‧백제시대의 고도(古都)로서, 옛 유물과 유적이 즐비한 곳이다. 국보 11호 미륵사지석탑을 비롯해 왕궁리유적, 쌍릉, 입점리고분 등과 미륵사지석탑에서 발굴된 사리장엄 등 수많은 유적‧유물은 익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적으로 등재시키려는 움직임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렇게 여러 문화유적들이 즐비한 익산의 북서쪽에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정감있게 착 와닿는 자그마한 절이 있다.
고려 충목왕 1년(1345)에 세워진 것으로 전하는 숭림사(崇林寺)가 바로 그곳으로, 해발 214m의 함라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함라산은 남쪽의 봉화산, 북쪽의 일치봉과 함께 금강과의 경계점에 형성된 산들 중 하나로, 옛부터 함열의 진산(鎭山)으로 불렸던 산이다.

숭림사 명칭, 중국 소림사에서 따와
숭림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때 진표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반면 보광전에서 나온 기와 명문에 충목왕 때 행여선사가 선종사찰로 크게 창건했다는 기록이 나와 공식적인 창건 연대는 이때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숭림사'의 명칭은 중국 소림사가 위치해 있는 숭산(崇山)의 숭(崇)과 소림사(少林寺)의 림(林)자를 따왔다고 전한다.
소림사는 달마대사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9년 동안 벽을 바라보는 참선수행 끝에 창건한 최초의 선종사찰로, 숭림사의 창건은 소림사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
대부분의 고대 사찰이 그렇듯 숭림사도 여러차례 전란의 피해를 입었다.
임진왜란 때인 선조 25년에는 보광전만 남고 다른 전각이 모두 소실되는 피해를 당했다. 당시 뇌묵당 처영대사가 숭림사와 금산사를 중심으로 승병을 일으켜 왜적과 맞서 싸웠던 것으로 전하고 있어 숭림사의 전란과 무관치는 않아 보인다.
순조 19년(1819)에 보광전을 중수하면서 현재와 같은 가람이 조성됐다.
숭림사 입구에서부터 좁은 도로의 양측에 심어진 벚나무는 봄 한철 장관을 이룬다. 요란한 벚꽃축제를 피해 한가롭게 벚꽃 흩날리는 모습을 즐기려는 시민들로 제법 북적인다. 하지만 그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한가롭고 오붓한 모습이 한결같은 곳이다.
숭림사 인근에 조성된 둘레길을 따라 함라산에 오르면 금강의 전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둘레길은 옛 임해사 터에 있는 야생차 군락지 등을 거쳐 입점리 고분군까지 이어져 있다.

보광전의 용 조각 닫집 눈길
절 자체의 규모가 작다보니 경내에 들어서면 모든 전각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면 축대 위에 보광전이 있고, 오른쪽에는 영원전, 왼편에는 정혜원, 보광전 옆에 나한전이 있다. 보광전 뒤쪽으로 오래된 소나무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아늑한 느낌을 더해준다.
경내에 있는 모든 건물이 맞배지붕인 점도 특색이다.
‘지혜의 빛으로 세상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보광전은 보물 제825호로 지정돼 있으며, 17세기 이전에 지은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3칸이며, 건물 안쪽에는 용이 섬세하게 조각된 ‘닫집’이 눈여겨볼 만하다.
‘닫집’은 궁전 안의 옥좌 위나 법당의 불좌 위에 만들어 다는 집 모형으로, 숭림사의 닫집은 조각의 수법이며 모양이 백미로 꼽을 만하다.
보 끝에 섬세하게 용머리를 조각해 놓았으며, 기둥 윗부분에 설치된 건축 부재들은 각각 연꽃, 용의 몸, 용 앞발이 여의주를 쥐고 있는 모양으로 장식돼 있다.
사자상이 조각된 청동은입인동문향로가 지방유형문화재 제67호, 목조석가여래좌상이 188호, 영원전의 지장보살좌상 및 권속 25구가 지방유형문화재 제189호로 지정돼 있다.

숭림사에 전해지는 설화
숭림사 지장보살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이 불상을 탐낸 일본인들이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가져가려 했다. 그러나 배가 출발하려고 할 때마다 태풍이 불거나 선장이 죽는 등 배가 움직일 수 없는 불길한 일들이 벌어졌다. 결국 일본인들은 불상을 군산항 보급창에 버리고 떠났다. 불상은 광복이 된 후에 한 선원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금칠이 다 벗겨져 시커먼 옻칠만 남은 지장보살에서 금빛이 나오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지장보살은 다시 숭림사로 돌아와 영원전에 봉안하게 되었다.
숭림사에 대한 설화도 있다.
고려 충목왕 때 왕비의 몸에 난 등창으로 왕실의 근심이 가득했다.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왕비의 병은 갈수록 심해졌다. 어느 날 왕비는 한 절에서 머무는 동안 병이 낫는 꿈을 꾸고, 그 절을 찾아 나섰는데 바로 숭림사였다. 왕비는 숭림사에서 관음보살에게 진심을 다한 기도를 드렸고, 마지막 기도하는 날 향기에 취해 잠이 들었다. 파랑새가 날아와 자신의 등창을 핥아주는 꿈을 꾸고 깨어난 왕비는 몸이 가벼워졌음을 느끼고 등창을 살펴보니 깨끗이 나아 있었다. 궁으로 돌아간 왕비는 보답으로 숭림사에 전답을 하사하고, 왕실의 원찰로 삼아 관음기도의 도량으로 삼았다고 한다.
/소문관기자․mk7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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