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을 다룬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이 흥행 가도를 달리면서 새삼 조명을 받는 전투가 있다. 바로 바다의 한산대첩과 거의 동시에 벌어진 육상의 웅치전투다. 전북 완주와 진안군 경계에 위치한 웅치는 험한 지형 때문에 방어하기가 좋은 곳이었다. 이 전략적 가치를 잘 읽은 조선군 지휘부는 웅치를 왜군의 진격을 막는 방어진지로 삼았다. 

  지금으로부터 430년 전인 1592년 7월 8일 새벽.
  왜장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왜군 1만여 명은 전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웅치를 넘으려 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조선의 관군과 의병 2천여 명은 이들을 맞아 3겹으로 방어진을 쳤다. 조선군은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김제 군수 정담 등이 전사하고 마지막 방어선마저 무너지면서 결국 왜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 전투는 조선군이 지고도 이긴 전투였다. 무엇보다도 왜군의 타격이 컸다. 비록 웅치를 점령하기는 했지만 많은 병력을 잃었다. 거기에 조선군의 맹렬한 기세에 놀라 사기도 많이 떨어졌다. 오죽하면 왜군은 조선군의 시체를 모아 ‘조조선국충간의담’이라는 비석까지 세우며 조선군의 충의에 경의를 표했을까.
  왜군의 이후 행보를 보면 웅치전투가 왜 이긴 전투인지 알 수 있다. 웅치를 넘어선 왜군은 전주 근교 안덕원에서 다시 조선군과 맞닥뜨린다. 그러나 전력을 많이 소모한 왜군은 조선군의 반격에 밀려 결국 금산으로 퇴각하게 된다. 
  이로써 조선군은 호남을 지켜내고 병력과 식량 등을 확보해 후일을 도모할 여유를 갖게 됐다. ‘약무호남 시무국가’라는 말은 바로 이 상황을 적은 것이다. 
  지난 5일 완주군과 진안군에서는 웅치전투에서 순국한 선열들을 기리는 행사가 있었다. 완주군은 소양면에서 ‘430주기 웅치전투 기념식’을 열었고 진안군은 부귀면 창렬사에서 추모제를 봉행했다. 이 자리에는 각급 기관단체장과 의병장들의 유족, 웅치전적지 보존회 회원 등이 참석했다. 특히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이 상영되면서 웅치전투에 관한 관심이 높아진데 대해 참석자들은 민족자존의 긍지를 느꼈다는 반응이었다.
  지금 웅치전적지는 국가사적지 지정을 앞두고 있다. 문화재청의 심의가 진행 중인데 가능성이 있다는 전언이다. 이를 계기로 웅치전투와 뒤이은 안덕원 전투, 이치 전투 등 전북에서 거둔 승리에 대한 학술 연구가 따라야 한다. 임진왜란 최초의 지상전 승리라는 안덕원 전투나 이치 전투 등도 재조명 될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 초기 전북 곳곳에서 관군과 의병들이 흘린 피가 국가 보전의 원동력이 되었음을 기억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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