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 전쟁 발발 72주년을 이틀 앞둔 23일 전북 김제시 죽산면 일원에서 6.25 전쟁 참전유공자인 이두영 씨가 학도병으로 참전했던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장경식 수습기자·guri53942@

“지금도 ‘통일이 되면 다시 학교에 갈 수 있겠지’ 생각했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6·25전쟁 발발 72주년을 이틀 앞둔 23일 김제시 죽산면 자택에서 만난 이두영 옹(91)의 말이다.

전북 김제 출신의 이 옹은 1950년 7월, 당시 19세의 나이로 학도병에 징집됐다. 4남 2녀 중 막내다 보니 가족들의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나라의 부름’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제대로 총조차 쏠 줄 몰랐던 어린 신병은 대구, 영천과 서울 등을 거쳐 7보병사단 8연대 1대대 1중대 1소대에 배치됐다.

강산이 일곱 번은 더 바뀔 만큼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전쟁의 참상은 이 옹에게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이 옹은 “입대한 지 얼마 안 돼 비학산에 배치됐다. 산이다 보니 주변에 물이 없었고, 비가 올 때마다 각자 우비를 이용해 빗물을 모아 마셔야 할 만큼 여간 어려운 환경이 아니었다”며 “양 진영에서 수시로 총탄을 쏘다 보니 나무들은 가지 없이 앙상해지고,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나뒹굴던 시신들이 부패해 냄새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치열했던 전장의 상황을 되짚었다.

집안의 막내로, 펜만을 잡던 어린 손은 곧 총을 쥐는 일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전쟁, 그것도 최전방에서 한 병사가 살아남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분대원 중 5~6명이 죽어 총조차 쏠 줄 모르는 후임 보급병들로 교체됐을 때는 막막함에 한숨도 나왔다.

이 옹은 “1129일, 만 3년 1개월간 안강전투, 어은산 전투, 영천 악어전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투들을 겪었다. 말 그대로 ‘사람이 서있으면 산 것이고 쓰러지면 죽은 것’인 상황의 연속이었다”며 “나도, 당시 함께했던 전우들도 나라를 지켜야한다는 사명감만으로, 서로를 의지해가며 버텼다”고 회상했다.

이두영 옹은 안강전투와 어은산 일대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전공을 인정받아 1950년 화랑 무공훈장을, 1951년 충무무공훈장을 각각 수여 받기도 했다.

이 훈장들을 받아 영광스러운 한편으로, 당시 함께 전장에 섰던 전우들의 소식이 때로 궁금하다고 이 옹은 전했다.

이 옹은 “나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불렀던 중대장, 한 마을에서 같이 올라가 동고동락했던 ‘김철수’라는 친구 등 전투가 치열했던 만큼 그리운 전우들도 많다. 누구는 죽었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지만, 한 번쯤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지금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묻자 이 옹은 가장 먼저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답했다.

이두영 옹은 “지금 우리나라의 모습을 보면 엊그제만 해도 우주선을 발사하는 데 성공하는 등 정말 많은 발전을 했다”면서도 “하지만 요즘 세대, 특히 어린 학생들을 보면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에 대해 차츰 잊어가는 것 같아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6·25 현장 최전선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그런 비극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린 학생들이 이전 전쟁에 대해 잘 알고, 안보 의식을 갖춰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두영 옹은 지난 1950년 7월 17일 학도병으로 입대해 1953년 장교로 임관, 1963년 3월 31일 전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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