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공 지포 김구 선생은 고려 말, 대몽항쟁이 지속되다가 결국은 몽고가 세운 원나라와 화친관계를 갖게 되는 국가존망의 어려운 시기에 살았던 인물로서 전라북도 부안 출신이다. 10여 년 전만해도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김구’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백범 김구 선생과 관련된 자료들이 주로 검색되었을 뿐, 고려 명현 문정공 지포 김구(金坵:1211~1278) 선생에 대한 기사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학술연구 자료를 모아놓은 ‘한국 학술연구정보서비스(RISS)’ 사이트에서도 ‘김구’에 관한 학술정보는 두어 편의 논문만이 검색될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포털 사이트에서도 인물정보와 각종 뉴스보도 등 김구에 대한 기사를 적잖이 검색할 수 있으며, RISS에도 김구 관련 논문이 20편 가까이 등록되어 있다. 최근 10여년 사이에 김구에 관한 학계의 연구가 전에 비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김구를 추모하는 현창사업 또한 여러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어난 변화이다. 그러나 아직도 문정공 지포 김구 선생은 그가 생전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룬 업적과 쌓은 공적에 비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게 사실이다. 더욱이 김구 선생의 두 아들인 김여우(金汝盂)와 김승인(金承印)은 우리나라 외교사와 학술사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업적을 남긴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행적에 대해 언급한 글은 거의 없었다. 당연히 일반 국민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을 수밖에 없었는데 최근 10년 동안에 미약하나마 이들 두 인물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져서 학계가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김구 선생이 위기에 처했던 고려를 위해 쌓은 공적은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24세의 젊은 나이에 초임벼슬로서 제주판관에 나아간 김구는 6년 동안 제주도에서 선정을 베풀어 지금도 제주도민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제주 판관에 부임한 젊은 김구는 제주의 논밭에 산재한 많은 화산석으로 인해 농민들이 농사를 짓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뿐 아니라, 애써 가꾼 농작물을 야생동물들이 뜯어먹어버린다든가 태풍으로 인해 수확을 목전에 둔 농작물이 가득한 논밭이 쑥대밭으로 변해 버리는 안타까운 상황을 목도하였다. 게다가 논밭의 경계가 불분명하여 강폭한 자들이 선량한 사람의 농토를 빼앗는 경우도 있음을 알게 된 김구는 이러한 여러 폐해를 한꺼번에 해결할 방법으로 논밭의 경계에 돌담 쌓기를 정책으로 실행하였다. 김구의 정책은 적중했다. 강폭한 자가 농지를 침탈하는 행위가 없어졌고 바람과 야생동물들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하는 효과를 얻었다. 한 목민관의 애민정신과 휴머니즘이 빛나는 효과로 나타난 것이다. 김구 선생이 이렇게 쌓은 제주도의 밭담은 오늘날 제주도의 명물이 되었고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으므로 제주도민들은 지금도 김구 선생을 기리고 있는 것이다. 김구 선생이 제주도에 밭담을 쌓은 공적에 대한 기록은 『지포선생문집』, 『신증동국여지승람』 ,『동문감』 등과 이원진(1594~ )이 쓴 『탐라지』 에 뚜렷이 보인다. 
김구 선생의 두 번째 공적은 그의 탁월한 문장력으로 당시 원나라로 보내는 외교문서를 전담함으로써 나라의 자존심을 지키면서도 실리를 따내는 탁월한 외교역량을 발휘했다는 점이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그의 표전문(表箋文:원나라에 보낸 외교문장) 69편이 그의 강한 애국정신과 탁월한 외교역량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김구는 외교문서뿐 아니라, 일반 시문창작에도 뛰어나 고려 말기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문장가로서 최자나 이제현 등이 극찬했다. 한국 한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문장가라는 점이 김구 선생의 세 번째 공적이다. 
김구 선생의 네 번째 공적은 원활한 외교를 위해서는 투철한 애국애족정신과 탁월한 외국어 능력을 갖춘 전문통역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여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국립통역관 양성기관인 통문관(通文館)을 설치했다는 점이다. 그가 설립한 통문관은 조선시대로 이어져 국가의 외교역량을 강화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김구 선생의 다섯 번째 공적은 훗날 조선의 건국이념 역할을 한 사상인 성리학이 유입되는 데에 선도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점으로서 이는 한국유학사와 학문학사에 특기해야 할 내용이다. 김구 선생은 부패한 무신정권의 비호아래 불교가 지나치게 난만하여 더 이상 국가를 이끌어갈 사상이 될 수 없음을 간파하고 일찍부터 유학진흥에 힘썼으며 원나라와의 외교 과정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성리학이 고려에 유입되도록 유도하였다. 이러한 정황은 최근의 연구를 통해 상당부분 밝혀졌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고려의 성리학 유입에 큰 공을 세운 인물로서 지금까지 알려진 안향(安珦1243~1306)보다도 김구를 더 높이 평가할 필요가 있다. 시대도 김구가 안향보다 32년이나 앞이다. 
김구 선생의 이러한 애국애민 정신은 그의 두 아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장자 김여우는 충렬왕을 모시고 원나라에 들어간 후, 원나라에 남아 무려 4년이나 끈질긴 외교활동으로 원나라 황제를 설득하여 고려와 원나라가 혼인동맹을 맺음으로써 고려의 국호와 왕통을 그대로 보전하도록 하는 공을 세웠다. 혹자는 고려가 원나라와 결혼동맹을 맺음으로써 원나라의 부마국(駙馬國:사위 나라)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하지만 당시 원나라의 영향력과 국제관계를 냉철하게 들여다본다면 고려와 원나라가 결혼동맹을 맺은 것이 얼마나 큰 외교적 승리이자 성과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몽고의 점령지는 모두 왕을 몽고 칭기즈칸의 후예로 교체하였고, 나라 이름도 몽고식으로 바꿨다. 그 나라를 멸망시켜버린 것이다. 당시 몽고의 침략을 당한 나라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국호와 왕통을 보전할 수 있은 유일한 방법은 결혼동맹이었다. 따라서 몽고의 침략을 받은 나라는 어느 나라라도 몽고와 결혼 동맹을 맺기 위해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으나 대부분 실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는 결혼동맹에 성공하여 독립국으로서의 국호와 왕통을 보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결혼동맹을 성사시킨 인물이 바로 김구 선생의 장자인 김여우이다. 당시 충렬왕은 김여우의 이러한 공적을 크게 치하하고 특별한 공신녹권인 단서(丹書)를 내렸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나라의 역사에는 김여우의 이러한 공적이 기록되지 않았다. 고려의 멸망과 함께 김구의 후예들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으로 고향인 부안으로 낙향하여 한 동안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조선의 입장에서는 고려 말에 있었던 이러한 구국의 노력을 달갑게 여기지도 않았을 터이므로 김여우의 행적이 묻혀버린 것으로 보인다. 김여우의 이러한 공적은 2012년 부안김씨 군사공파 재실인 취성재 벽장에서 ‘문한공 단서’라는 이름으로 판각된 목판과 초판 인쇄물이 발견됨으로써 세상에 구체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김여우는 4년 동안 원나라에 머물면서 기회가 될 때마다 원나라 황제를 만나 고려의 입장을 알리면서 황제를 설득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황제는 김여우에게 “고려에서도 문묘를 세워 공자를 모시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김여우는 임기응변으로 “그렇다”라고 답하였지만 사실 당시 고려에는 교육을 담당한 향학만 존재했을 뿐, 교육과 제향을 겸한 기능을 갖춘 원나라 식 ‘향교’는 아직 설립되어 있지 않았다. 이에, 김여우는 귀국 후 곧바로 마침 강릉 존무사(存撫使:고려 후기 지방에 파견한 지방관)로 나가 있던 아우 김승인에게 말하여 강릉에 교육공간과 제향공간을 겸한 향교를 짓게 하였다. 오늘날 강릉향교를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라고 칭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고, 2013년에 강릉향교 700주년 기념비를 세운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김승인이 강릉향교를 건립한 사실은 현재 강릉향교에 보관되어 있는 ‘기문(記文)’현판에 역력하게 기록되어 있고, 홍봉한 등이 왕명을 받들어 편찬한 책인 『동국문헌비고』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2013년에 세운 ‘강릉향교700주년 기념비’에도 또렷이 새겨져 있다. 
나라가 어려움에 빠져 있던 고려 말기에 문정공 지포 김구 선생 3부자는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내다보며 많은 일을 했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어렵게 극복해 가고 있는 우리는 이들 3부자로부터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안으로 나를 성찰하는 성격이 강한 우리의 전통학문인 유학은 인류에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유학 진흥과 성리학 유입에 많은 역할을 한 지포 김구 3부자의 행적을 다시 들여다 봐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전라북도에 전라유학진흥원을 건립하여 이 시대에 유학이 다시 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지금 세계는 외교 전쟁을 치르고 있다. 현재 비참한 전쟁을 겪고 있는 나라도 있다. 어느 때보다도 외교와 통역이 중요한 시대이고 경세의 문장이 필요한 시대이다. 지포 김구 선생 3부자의 외교행적과 문장 능력을 살피고 배워야 할 이유이다. 21세기는 소외받거나 강자에 의해 짓눌리는 사람이 없이 다 함께 잘 사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문정공 지포 김구 선생이 24세의 젊은 나이에 제주의 백성을 위해 밭담을 쌓은 휴머니즘을 따뜻한 마음으로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이다. 지포 김구 선생 3부자는 이 시대에 우리가 추모하고 현창해야 할 전북의 큰 인물인 것이다. 

김병기(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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