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km로 세계에서 가장 긴 새만금방조제를 바라보면 착잡한 심정과 기대감이 교차된다. 이는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착잡한 심정은 착공 30년이 지나도록 망망대해로만 기억되는 데서 비롯될 것이다. 기대감은 세계적인 첨단도시로의 발전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변산반도, 새만금간척지를 둘러싼 우리나라의 해양역사를 돌이켜 보면 우리는 새만금 신도시를 통해 희망을 쏘게 될 것이다.

필자의 역사 스승이신 송화섭 교수께서 『전북문화살롱』 11월호에 기고한 「나의 문화유산 비화」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동아지중해(East Asian Mediterranean Sea)의 해양강국이다. 동아지중해라고 부르는 것은 동아시아 대륙에서 한반도가 바다로 뻗어 나오고 태평양을 향해 해양 교통길이 활짝 열려있기 때문이다. 유럽지중해는 유럽대륙에서 이탈리아가 뻗어 나온 데서 만든 조어이다. 유럽지중해는 정체돼 있는 반면에 동아지중해는 역동성이 살아 있다. 우리나라 지도를 거꾸로 돌려놓고 보면 동아지중해설이 잘 이해가 될 것이다. 이 같은 설은 민족종교 증산교의 풍수지리 해석과 비슷한 점이 있어 흥미를 끈다. 

우리나라는 3면 바다, 1면 육지의 한반도와 부속도서 일대를 영토로 하고 있다. 그만큼 해상교통과 정보량이 바다를 통해서 들여오는 게 육지보다 3배가 된다. 바다를 활용하고 바다로 진출할 때 우리나라는 동아시아 강국으로서 위용을 떨쳤다. 대륙에 종속적인 태도로 사대주의에 매몰된 조선시대에는 국력이 쇠퇴하고 해양국가 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한 적도 있었다. 

바다와 대륙이 상호교류하며 동아지중해가 역동성을 띨 때 반구대 암각화를 남겼다. 북극해역인 베링해협의 해양생태문화가 동해안까지 내려온 것이다. 서해안을 통해서는 중국 요령성의 청동기문화와 산동성의 철기문화가 도래했다. 요령성에서 비파형동검이 내려왔으며, 제나라 전횡장군은 철검을 들고 황해를 건너 전주 혁신도시에서 철기문화의 꽃을 피웠다. 남해안으로는 인도-인도네시아 선사시대 고인돌이 화순, 고창, 강화, 대동강, 발해만으로 올라왔다. 동아시아 고인돌 노선을 따라 수없이 많은 해상들이 남해안으로 올라왔다. 인도 아유타국 황후 허황옥은 배를 타고 들어와 김수로왕과 함께 금관가야국을 세웠다. 신라에 들어간 무슬림들은 정착한 후 신라 땅이 살기 좋아 절대로 신라를 떠나지 않았다. 

북인도를 비롯해 이란, 터키, 카스피해, 흑해 주변까지의 서역문화는 초원길, 사막길, 바닷길 세 갈래로 한반도로 들어왔다. 초원길은 서역에서 북아시아 초원지대의 유목문화를 전해준 길이었다. 사막길은 타클라마칸 사막지대 남쪽 협곡과 고갯길을 넘어서 중국을 거쳐 황해를 건너 한반도 서남해안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바닷길은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해 남인도를 경유해 말라카해협을 통과하고 남해안으로 올라오는 바닷길이었다. 이 바닷길은 해상 고속도로 역할을 수행했다.     

서역문물의 동방전래는 백제와 신라, 고려시대에 활발하게 전개됐다. 서역의 문화가 초원길에서 질주하는 말에 실려 동쪽으로 이동해 한반도로 들어왔다. 바닷길에서는 해류를 따라 동쪽으로 이동해 한반도로 들어왔다. 서역의 문화는 해가 뜨는 동쪽으로 향했다. 동아시아 가장 끝에 있는 한반도가 초원길과 사막길, 바닷길의 최종 기착지이다. 서역문화는 금관을 비롯해 원성왕능의 석인상, 유리 유물 등 여러 형태로 그 흔적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삼국시대,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황해 연안으로 올라오는 배들은 변산반도를 경유했다. 오늘날 변산반도를 중심으로 새만금신도시가 건설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역사는 여러 세기를 두고 반복한다. 고대역사에서 보는 것처럼 동아지중해의 중심으로서 새만금 신항과 공항을 통해 전 세계인이 찾아오고 교류를 하며 공동의 번영을 이룩하고자 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동아지중해의 꿈을 이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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