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의 동과 서를 잇는 굽이굽이 긴 고개, 그 산세가 하도 험해 60명이 모여서 함께 가야만 넘을 수 있다 해 이름 붙여진 육십령을 넘어오면 초가집, 너와지붕, 낮은 돌담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주촌마을을 만날 수 있다.

맑은 공기와 물을 가진 천혜의 자연 환경을 가진 주촌마을은 코로나19, 답답한 도시를 벗어나 ‘힐링’을 위해 찾는 방문객들이 늘어나고 있는 곳이다.

▲ 충절의 고장, 장수군 장계면 '주촌마을'
장수군 장계면에서 26번 국도를 따라 육십령쪽으로 4km쯤 달리다 오동, 대곡의 군도를 3.5km쯤 거슬러 올라가면 깊숙한 산골에 자리한 논개생가와 의암 주논개의 태생지인 주촌마을이 나온다.

주촌마을은 400여년전 범바위골(주촌의 건너편에 있었다)에 사는 주달문이라는 학자가 이곳에 새터를 잡아 서당을 차리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고 전해져 온다.

장수삼절의 주벽이요, 충렬의 여신으로 추앙받는 의암 주논개가 이 마을에서 출생하여 13세까지 성장하면서 부친 주달문에게서 글을 배웠기 때문에 주씨의 마을이라는 뜻에서 주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의암 신안주씨 논개지려(義巖 新安朱 論介之閭)’ 라고 쓰여진 비석이 방문객들을 맞는다.

마을 내에는 우리 조상들의 진솔한 삶이 담긴 물레방아, 연자방아, 디딜방아, 모정 등 우리 고유의 전통시설과 논개정려비각이 있다.

최근에는 ‘아가씨를 부탁해’, ‘1박2일 촬영지’로 논개역사 문화체험, 도깨비체험, 민속생활체험, 레포츠체험, 드라마 촬영지 현장체험, 꽃체험 등을 할 수 있다.

또한 각종 체험프로그램이 개발 운영되고 있으며, 논개생가 장수도깨비전시관과 연계되어 새로운 관광지로 부각되고 있다.

▲ 논개, 그 역사의 시작! 논개생가
날과 밤으로 흐르고 흐르는 남강은 가지 않습니다.
바람과 비에 우두커니 섰는 촉석루는 살 같은 광음을 따라서 달음질칩니다.
논개여, 나에게 울음과 웃음을 동시에 주는 사랑하는 논개여!
그대는 조선의 무덤 가운에 피었던 좋은 꽃의 하나이다.
그래서 그 향기는 썩지 않는다.
한용운 <논개의 애인이 되어서 그의 묘에> 中

주논개는 1574년 9월 3일(선조 7년), 주촌마을 훈장 주달문과 밀양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 사망후 모녀는 숙부 주달무 집에 의탁하다 주달무가 논개를 김풍헌의 집에 민며느리로 보내려하자 어머니와 외가에 피신했다가 체포되어 장수관아에 수감됐다.

5세가 되는 1578년, 장수현감 최경회 심리로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갈 곳이 없던 모녀는 무장현감으로 전직된 최경회를 따라갔고 논개는 최경회가 사도시정으로 갈 때 수행하며 최경회의 부실이 되었다.

이후 선조 26년(1593) 6월 29일 임진왜란으로 진주성이 함락되자 남편 최경회는 순국하였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논개는 왜병들이 7월 7일 촉석루에서 승전잔치를 벌인 날, 기생으로 가장해 왜장 게야무라 로꾸스케의 허리를 껴안은 채 남강으로 몸을 던졌다. 그때 그녀의 나이 19세였다.

논개가 순절한지 200년이 흐른 뒤 명정의 특전이 내려지면서 주촌마을 입구에 정려를 세웠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비, 바람에 훼손돼 1997년 주촌마을 입구에 다시 복원했다.

▲ 이제는 사라진 수몰마을
사실 주촌마을은 과거 현재의 위치가 아니었다. 1986년 대곡호를 축조하면서 주촌국민학교와 논개생가, 주촌마을 70여 호가 수몰됐다. 이로 인해 143명의 실향민이 생겼고, 한순간 고향을 잃은 이들을 위해 2014년 망향정을 세웠다.

지금의 논개생가는 마을 수몰 당시 저수지 근처에 생가만 복원해뒀던 것을 1996년부터 2000년까지 5년에 걸쳐 새로 복원한 것이다.

논개생가지에는 생가만 있는 게 아니다. 논개 기념관, 단아정, 의랑루 등의 건물과 주논개비, 최경회비, 주논개 부모묘 등이 함께 자리잡고 있다.

특히 봄이면 의암로를 따라 대곡호 주변으로 연분홍 빛의 벚꽃이 만개해 아름다운 꽃길이 펼쳐져 많은 이들의 발길을 끈다.

▲ 백두대간 자연 속 고즈넉한 한옥에 취하다
대곡관광지는 백두대간의 기(氣)를 받아 수려한 산세와 물이 있는 장수에 조성된 한옥숙박단지다. 더 머물고 싶고, 더 즐기고 싶은 콘셉트로 많은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다.

장수 위인의 얼을 느낄 수 있는 이곳은 사계절 내내 평화롭다. 주변이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져 있고 아래쪽에는 의암 주논개가 태어난 주촌마을이 자리 잡고 있어 한옥의 고즈넉함과 시골의 정겨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주촌마을에 조성된 한옥숙박단지는 목재와 황토를 이용해 총 4개 단지 21객실이 있다. 오두막집 단지는 독립형으로 10객실이 조성돼 있고 한옥 2단지에 조성된 다목적실은 각종 단체의 워크숍, 세미나, 소모임 등 다목적으로도 활용된다.

4개의 한옥단지 명칭은 1단지 방촌옥(尨村屋), 2단지 백장옥(白莊屋), 3단지 의암옥(義巖屋), 4단지 충복옥(忠僕屋)으로 장수인물의 호와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1단지 방촌옥(尨村屋)은 조선의 정치, 문화, 국방의 정부 기반을 닦았던 조선의 명재상 황희 선생의 호를 따 지은 방으로, 황희선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에도 장수의 인물로 기록이 되어 있다.

2단지 백장옥(白莊屋)은 고려시대 공민왕 때 대제학(大提學)의 높은 벼슬에 있었으나, 나라가 멸망하자 치악산 (雉岳山)으로 들어가 수행한 성리학자 백장선생의 이름을 따 지은 것으로 백장선생은 조선태조 이성계 및 태종 이방원이 조선을 건국한 후 벼슬을 내렸으나 출사에 불응해 이곳 장수 땅에 유배되어 1418(태종18년)생을 마쳤다.

3단지 의암옥(義巖屋)은 장수에서 태어나 임진왜란 때 기생으로 가장해 나라를 위해 순절한 열녀인 의암(義巖) 주논개(朱論介)의 호에서 따온 것으로, 주논개는 진주 촉석루에서 왜장 케야무라 로쿠스케를 끌어안고 투신 순국하였다. 그 후 논개가 투신한 바위에 의암(義巖)라는 글자가 새겨지면서 바위와 논개를 동일시하여 논개의 호가 의암(義巖)이 되었다.

4단지 충복옥(忠僕屋)은 임진왜란 때 장수향교를 지킨 충복(忠僕) 정경손(丁敬孫)의 호를 따 지은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를 비롯한 열읍의 향교는 거의 소실되었으나 충복(忠僕) 정경손(丁敬孫)의 공로로 오직 장수향교만 전화를 입지 않고 조선 전기 향교의 형태 그대로 잘 보존된 것이다. 정경손은 의암 주논개, 순의리 백씨와 더불어 장수의 삼절(三絶)로 불린다.
/최병호기자·hoya0276@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